쉽다면 거짓말이다
캐나다 어느 작은 마을에 짐을 푼지 2주일이 되어간다. 아이들은 더듬더듬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우리는 내내 마트를 찾아다니며 냉장고를 채우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지 싶다. 마늘 한 쪽 없는 텅빈 냉장고를 과일, 채소, 고기, 냉동식품, 식빵, 우유, 케첩 등으로 차곡차곡 하나씩 채워가기 위해서는 매일 들르는 마트로도 부족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생활비, 정착에 들어가는 예상치 못했던 각종 비용들. 부족하게 어렵게 살아보겠다고 선택한 일임에도 마트에서 장을 보고 계산을 할 때면 쪼그라드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친척도 친구도 하나 없는 낯선 땅에 정착하기란 결코 호락한 일이 아니다. 급하게 얻은 집은 예상보다 더 어둡고 습한 반지하방이었고, 친절하다던 주인 아줌마는 여지껏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 도대체 쓰레기 분리수거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직도 방법을 못 찾고 마냥 쌓아두고만 있다. 옆집에는 날마다 정원을 가꾸느라 하루 종일 바쁜 인도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데, 그는 정말 바빠서 우리의 작은 질문에도 도통 건성이다. 늘 'How are you'를 외치지만 실상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는 걸 이제야 눈치챘다. 아, 한 가지 굉장히 관심을 보인 일은 우리가 남한에서 왔는지 북한에서 왔는지였다. 남한에서 왔다니까 예상 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정말이냐고 물어보는데 도대체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고는 있는건지 궁금해졌다. 한국에서도 쇼핑이라면 마트라면 질색하던 아이들이다. 여기서 원치 않게 계속되는 장보기에 지쳐 이제 마트는 제발 그만 좀 가자며 징징거렸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라 아이들만 집에 두고 갈 수 없다는게 우리도 못내 아쉬웠다. 한국에서는 이래저래 잘 두고 일보러 다녔었는데 차가 그득하도록 매일 붙어다니는게 좋으면서도 싫다. 어쩔 수 없지. 나도 너희들이랑 이렇게까지 붙어다니고 싶은 건 아니라는 말을 속으로 다섯 번쯤 중얼거리며 아닌 척, 즐거운 척 붙어다니고 있다.
애들 학교도 평탄치는 않다. 산만하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둘째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아이의 행동을 관찰한 리포트를 교육청에 제출했고, 기다렸다는 듯 등교 3일만에 무거운 연락이 왔다. 상담을 하자고 하여 무거운 마음으로 더듬거리며 교육청에 찾아갔다. 통역을 위한 분이 나와주셨고 처음 만난 낯선 한국인 분께 아이의 사정을 호소하며 잘 좀 통역해달라고 부탁드리는 것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상담은 제법 편안한 분위기였지만 상담을 앞두고 내내 쪼그라들었던 우리 부부의 마음은 쉽게 다시 펴지지 않은채 여전히 날마다 조심스럽다.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만나는 담임 선생님께 아이가 오늘 어땠냐고 여쭈어볼 때의 두근거림, 선생님께서 엄지를 척 들어보여주실 때의 녹아버리는 마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하루도 편치는 않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쉬울거라 생각하고 시작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예상보다 만만치 않은 생활이다. 아이들이 학교만 잘 다녀준다면 매일 싸는 도시락 쯤은 하나도 힘들어하지 않으리라 호언장담했지만 학교가 재밌다며 여유를 부리는 아이들을 보며 내일 도시락은 뭘 싸주지 하는 고민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참 어렵고 불편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때로 서글픈데, 그런데 너무 예쁘다. 여기, 캐나다. 여기, 이 동네. 눈만 들면 종류도 다양한 갖가지 나무들이 주륵 늘어서있고 발 아래 들꽃들이 촘촘하다. 길은 시원시원 뚫려있고 어디도 붐비지 않으며 어디도 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널찍한 공간, 파란 하늘,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한 구름, 푸른 잔디, 고소하고 깨끗한 공기까지. 열심히 돌아다녀 간신히 구한 비싼 김치를 사갖고 돌아오는 길에도 하늘은 왜 이렇게 예쁘고, 교육청에서 아이 상담 후에 검사 일정을 잡자는 말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도 바람은 왜 이렇게 상쾌한지. 무거운 마음에 좀 걸어볼까 싶어 나간 마을 산책로에서 만난 동네 주민들은 하나같이 눈을 마주치며 선하게 예쁘게 웃어보인다. 여기 캐나다 맞구나. 그래, 여기 캐나다였어. 다들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캐나다에서 내가 살고 있는거라구.
막연한 환상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잘 할 수 있을거라 장담했다. 장담은 절반의 성공을 치루는 중이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잘 하고 있는거라 스스로를 위로하고 응원하고, 아프지 않고 밥 굶지 않으면 되는거라고 안도하며 하나씩 조금씩 단추를 끼워가고 있다. 예상보다 높은 마트 물가에 마음이 쪼그라들어 맘편히 외식 한 번 못하고 매끼 냄비밥 해먹느라 하루가 짧지만 이렇게 하는 것말고는 달리 뭘 해야할지 뭘 하지 말아야할지 어떻게 하는게 더 잘하는건지 모르니 하루하루 더 즐겁게 더 감사하게 사는 것이 지금 내게, 우리 가족에게 최선이리라.
이은경 Writer 매일 읽고 날마다 씁니다
[그렇게 초등엄마가 된다], [초등6년이 아이의 인생을 결정한다]
[참쉽다초등학교입학준비], [우리들의 멋스러운 무단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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