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경 Mar 17. 2019

젊은 작가들에게 충고하고 싶습니다.

젊을 때 다른 직업을 찾아보세요. - 조 퀴넌



한 번 쓰기 시작한 사람은 절대 그만 쓸 수 없다. 당연히 이 사실은 모르고 시작했다. 한 권만 딱 써보고, 그렇게 해서 어려운 집안 경제에 다만 얼마라도 보탬이 되어볼까 하는 맘에 시작한 일이었다. 내 이름의 책이 나오고 그게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게 부끄러워 본명도 숨겼다. 그래서 여전히 첫 책은 그 당시 정했던 '이른비'라는 필명으로 판매되고 있고, 도대체 '이른비'는 누구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렇게 내 인생의 글쓰기는 시작됐고 끝나지 못한 채 계속되고 있다. 이제는 이것을 끝낼 자유가 없어졌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인세 때문이냐고? 인세는 이 일을 계속할 만한 동력이 될 정도로 큰 금액이 아니다. 그렇다면, 작가로 유명해지는 것에 대한 욕심이 생겼냐요?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는 건 돈도 안되면서 때로 한없이 불편한 일이다.

왜 끝내지 못하고 계속 이렇게 미간에 힘을 주며 자판을 두드리는 걸까. 왜 끊지 못하는 걸까.


글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뇌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한 주에 스무 권도 넘는 책들을 무식하게 읽어치우던 시절에도 나의 뇌는 그만저만했다. 여전히 틈날 때마다 스마트폰의 연예 기사를 검색했고 좋아하는 현빈 님의 드라마에 빠지면 일상이 중지될 정도로 하루가 짧았다. 열심히 무식하게 꾸준히 읽긴 했지만 책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유튜브의 자극적인 영상이나 오랜 친구들과의 수다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읽던 뇌'가 '쓰는 뇌'로 바뀌면서 뇌의 움직임이 달라졌고 결국 내 일상은 모두 바뀌어 버렸다.


하루 종일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쓰기에만 몰두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럴 시간 여유는 충분치 않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을 돌보고 일을 하는 사이사이 틈을 내어 몇 자 적곤 하기에 쓰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유로 일상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진 않았다. 달라진 건 머릿 속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의 종류들이 달라졌고 생각이 움직이는 속도, 방향이 획기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티브이를 보든 책을 보든, 친구들과 남편 욕을 하든 직장에서 상사 욕을 하든 새롭게 얻게 된 정보와 상대방의 감정들이 움직여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모르는 이가 없을 지난겨울 화제의 드라마 스카이캐슬. 나 역시 흥미진진했다. 엄마들 중 어떤 엄마가 젤 고약한지, 아빠들 중 누가 젤 재수 없는지. 혹은 엄마들이 입고 나온 코트 브랜드가 궁금하거나 머리카락 색 중 맘에 드는 것으로 바꾸고 싶어 미용실을 기웃거렸겠다. 이전의 나였다면 드라마 내용, 배우들의 연기, 시청자들의 댓글 등 드라마가 내게 주는 정보, 화면, 스토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이다. 저렇게 키우지는 말아야겠다, 혹은 저런 동네가 진짜 있다며?라는 다짐과 잡담이 섞인 수다를 나누며 '재미있더라'는 후기를 나누었을 것이고. (아줌마들끼리의 수다는 기본적으로 드라마 후기를 안고 시작된다.) 글쓰기 이전의 나였다면 그렇게 깔깔 웃으며 넘어갔을 드라마 한 편에 전에 없던 진지함과 창의성이 마구 샘솟아 결과적으로는 드라마 몰입을 방해할 정도였다.


이 재미있고 교훈적인 드라마를 보면서 내 뇌는 다른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비판하는 책이 많은데, 역으로 그걸 대놓고 찬양하는 글을 써보는 건 어떨까.'

'사실 다들 위로가 필요한 안쓰럽기 그지없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입시에 시달리는 엄마, 아빠들을 위한 글은 어떨까.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의 위로가 큰 힘은 되지 못하겠지.'

'엄마표 영어, 엄마표 홈스쿨링에의 관심이 많은데, 학원 표 영어, 학원 표 전과목에 관한 지침서는 없지 않은가.'

'입시 코디네이터라는 아직은 생소한 분야의 직업이 화제인데, 이 직업에 관한 진로 도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엄마와 얘기할 때 자꾸 짜증이 나는 이유에 대해 분석해볼 필요가 있는 듯.'


일부일 뿐이다. 뇌는 잠시도 쉬지 않고, 새로운 소재, 새로운 감정선, 새로운 직업, 새로운 대사를 발견할 때마다 그것을 글쓰기의 소재로 삼기 위해, 혹은 책의 기획으로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도 돌아가고 있었다. 그만 하고 싶어도 쉽게 멈추지 않을 만큼 틈나는 대로 혼자 돌아가고 새로운 걸 만들어내고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있는 뇌를 달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내 일상이 어떻게 달라졌냐고? 굉장히 재미있거나, 완전 머리 아프지 않냐고?



가장 달라진 건, 툭툭 튀어나오는 아이디어들을 기록하기 위해 늘 메모를 준비해서 다니고 그 메모를 글로 옮기고 다듬으며 조금씩 똑똑해지고 있단 사실이다. 아무것도 아닐 지극히 사소한 아이디어, 소재 하나도 그냥 잊지 않기 위해 스마트폰 메모장이 꼭 필요하고 급하게 남긴 메모를 근사한 글로 만들어 세상에 내보이고 공감을 사기 위해 역시나 뇌는 또 바쁘다. 나의 두 아이에게 날마다 글을 쓸 것을 권하는 이유, 다 늙어 독서도 꺼리는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좋으니 글을 써보라고 권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뇌가 움직인다. 뇌가 스스로 움직인다. 뇌가 스스로 움직이면서 부지런한 생각들을 잡아내고 기억하고 발전시키고 있다. 같은 상황에 닥쳐도 이전보다 더 똑똑하게 지혜롭게 제대로 판단하는 내 모습을 보는 일은 굉장한 행운이다. 이전에 워낙 좀 판단력이 약하고 신중하지 않았으며 지혜도 지식도 짧은 사람이었기에 유난한 발전이 있었으리라 생각도 한다. 어쨌든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기한 일인 터라 누구든 만나면 글을 써보라고 권하는데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했으면 참 좋았겠다 싶다.


카페에 자주 간다. 물론 커피를 마실 목적은 아니다. 노트북, 메모수첩, 볼펜, 책을 가방에 찢어질 듯 가득 담아 카페 어느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노트북 전원을 연결하고 겉옷을 벗어 정리하고 커피를 주문했다가 찾으러 가야 하는 과정은 꽤나 번거로운데, 그럼에도 추운 날 책 보따리를 싸들고 카페에 앉아 오랜 시간을 버티며 글을 쓰는 건 그곳에서의 뇌의 움직임이 활발한 이유다. 뇌가 어느 정도로 활동성 있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세밀하게 느낄 만큼 뇌와 퍽이나 친밀해졌다. 뱃속의 아이가 잠을 자는지, 딸꾹질을 시작했는지, 발차기를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아도 모두 느낄 수 있었던 막달의 생생한 느낌과 다르지 않다. 생각을 지배하는 뇌의 어느 부분이 지금 움직이는지 멈춰있는지 혹은 점점 더 활발해지는지 피곤하여 슬슬 느려지는지 섬세하게 바로바로 느낄 수 있다. 대단히 깊은 학문을 연구해본 적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며 적어도 글을 쓰지 않고 살아가는 주변의 대다수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일 것이다. 이 신기한 경험을 누리길 권한다.


젊은 작가들에게 충고하고 싶습니다, 젊을 때 더 열심히 쓰십시오 - 이은경

                  


이은경 Writer

인스타 @lee.eun.kyung.1221

네이버까페 [이은경작가와 함께써요]

메일 bobguelt@hanmail.net

유뷰브채널 [이은경TV]



매거진의 이전글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