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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비 Mar 06. 2019

부모라는 권위 이면의 무거움

권위는 무엇일까? 그 이면의 무거운 책임에 따르는 권한.

 최근 아버지가 나에게 무척이나 서운해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나의 반응 때문이었다. "너는 부모한테 친구한테 말하듯이 하냐!"라고 말씀하시는데, 머리에 망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턱 하고 숨이 막혔다. 아버지는 꽤나 오래 참아오신 듯 말을 이어가셨다. '화' 뒤에 숨겨진 '서운함'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왜 나는 정말 소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를 친구 대하듯 했을까? 만약 내가 그런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왜 아버지에게 그런 느낌을 전하게 되었을까? 그건 정말 내가 원하는 게 아닌데...


"너는 부모한테 친구한테 말하듯이 하냐!"
머리에 망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나는 '교육'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다. 대안 교육을 경험하며 많은 생각과 공부를 했다. 수직적이지 않고 수평적인 관계가 가진 힘, 부모의 권위와 욕망이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양한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온전히 수평적으로, 그 아이의 자유와 선택 의지를 존중하고, 많은 대화를 통해 아이에게 당연한 개념을 주입하는 게 아닌 토론하여 함께 만들어나가고 싶었다. 나는 상상 속에서 온전히 수평적이고 권위적이지 않은 부모이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내가 살아가며 아이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아이의 속도에 맞추어 이야기하고 토론할 만큼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인본주의의 시대정신을 가진, 혁신적 포용 국가를 꿈꾸는, 4차 산업 혁명의 기술력을 가진 지금의 세대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부모 세대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했고,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부모의 아래에서 자랐다.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또 '이권주의적 자본주의'의 사회 시스템에서 살아남는데 전력을 다해야 했다. 최근 들어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버지가 살면서 어머니께 가장 많이 한 말은 "내가 회사 그만두면 우리 가족 얼마나 버틸 수 있어?"라고 한다.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었다. 단지 현실적인 여력과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어린 시절 회사에 충성을 다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는데, 아버지가 가진 삶의 무게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무거운 책임을 지고 살아오셨다. 그런 아버지께 한 마디 대화도 없이 내 마음대로 수평적인 관계로 편하게 생각했다. 권위, 가부장적 태도는 나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건방지게 아버지를 가르치려 했다. 그날 밤, 아버지께 너무나 죄송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권위는 책임에 대한 당연한 권한이었다. 내가 불편한 방식에 대해서 충분히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분명히 아버지는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 부분에 대해 충분히 대화하고 조정하려 노력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권위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서 권위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신'의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권위는 인정을 받는 과정에 따라 대상에게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면 우리 아버지의 권위는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를 취하셨지만 나에게 충분히 설명하려 하셨고, 나의 의문에는 끝까지 대화하고 토론했다. 물론 어린 나는 아버지의 논리에 대부분 설득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나의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사회적으로 자신의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향하는 권위적인 태도는 문제가 있다. 어릴 적 발가벗겨 내쫓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실제로 내복만 입은 채 쫓겨난 적이 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쫓겨난 기억은 또렷하게 남아있다. 결과만 놓고 보더라도 문제가 있는 방법이다. 잘못을 교육하려는 훈계가 잘못은 기억에 남기지 못하고 폭력적인 상황만 기억 속에 남겨두었다. 다른 선택지를 생각해볼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향하는 권위는 분명한 폭력이다. 선택지가 없는 사람에게 마치 선택할 수 있다는 것처럼 권위를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집에서 내복 바람으로 쫓겨난 아이는 용서를 구하고 집에 들어가는 선택지뿐이 없다. 신체적인 체벌을 받는 아이는 부모가 행하는 죗 값을 치르고 용서를 구하는 선택지뿐이 없다. 직장에서 인사 권한을 가진 상사의 부당한 요구에 아래 직원은 요구에 응하는 선택지뿐이 없다. 누군가는 극단적인 예시를 들며 그에게 선택지가 있다고 말한다. 얼마나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말인가? 태어나 나의 전부인 가정을, 수많은 경쟁을 지나서 들어온 직장을 떠난다는 결심에 얼마나 많은 용기와 포기가 필요한지 조금만 그의 입장으로 상상해보면 그런 말은 쉽게 할 수 없다.


 그렇다. 권위는 사회적 직위나 상황이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인간은 똑같이 소중하고 평등하다.'라는 논리로 세워진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 사회적 직위나 상황이 만든 권위는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상황을 만든다. 따라서 경험, 인성, 능력 등 개인의 삶의 과정 대한 개인적, 사회적인 인정이 권위를 형성해야 한다. 구성원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권위가 형성되어야 한다. 구성원이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사람 이 권위를 가져야 한다. 또한 삶의 과정에 대한 권위는 결과물이 아니고 계속 개선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누구나 이면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수평적인 관계에서는 권위와 관계없이 각자의 의견과 생각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은 개인이 가지는 모순에 빠지지 않고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과정은 조직과 사회, 개개인에게 높은 생산성을 제공한다. 엘리너 오스트롬 교수는 <공유의 비극을 넘어>(1990)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한 규범을 더 잘 준수하고 더 높은 생산성, 혁신을 만드는 현상을 여러 공유재 이용 사례를 통해 증명한다. 즉, 권위의 주체가 만들어낸 규범보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낸 규범은 더 높은 생산성,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수평적인 관계가 동등한 권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무임승차' 현상이 발생하여 조직을 위해 아무도 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 권위를 지닌 사람이 더 많은 책임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더 많은 책임을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어야 한다. 그의 노력을 인정하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보상해야 한다. 또 수평적으로 의견을 수렴하고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은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만약 모든 의사 결정을 수평적으로 진행한다면 조직에서 높은 생산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수평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한 사안과 그렇지 않은 사안을 구분하여야 한다. 빠르게 결정하고 수평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하지 않은 사안이라면 권한을 가진 사람이 논의 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리해보자면, 아버지에서 시작하여 권위를 당연하지 않게, 낯설게 보았다. 권위는 사회적 직위나 상황이 만들어서는 안 된다. 권위는 경험, 인성, 능력 등 개인의 삶의 과정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인 인정이 형성해야 한다. 대신 권위를 가진 사람의 더 많은 책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수평적인 결정이 필요하지 않은 사안에 대한 더 많은 결정, 선택 권한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수평적인 관계에서 더 나은 방향을 위한 방법을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이, 사회가 그런 거야. 남의 돈 벌기가 쉬운 줄 아냐? 조금만 버티고 참아봐. 다들 그러고 살아" 그게 기존 사회의 구조와 논리라면 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다. 적응 가능한 사회를 고민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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