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비 Nov 11. 2021

내 주변에 미친놈은 앞으로 없기를 바라며

오해를 만드는 사람에 대하여

 오늘도 역시나 바쁜 하루였다. 정신없이 일하다 창 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간다. 문득 직장 동료가 공유한 글을 읽다 보니 계속해서 깊은숨을 뱉어내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정도의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전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아는 나로서는 글자들이 모인 '쓰레기'라고 밖에 칭할 수 없다. 분명히 오해를 만들고자 작정한 글이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나는 그를 온전히 싫어하기로 했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내 모습이 반갑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책임지지 못할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만 앞서는 건 꼴불견이다. 모든 면엔 양면이 있다고 믿는다. 일방적인 시선에서 한 면만 보고 쉽게 판단하는 건 옳지 않다. 또 '네가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솔직히 이야기하는 거야' 이건 확실히 오만하고 멍청한 소리다. 진짜 누군가를 위한다면 더 조심스럽게 솔직해야 한다.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모르고 있는 면은 없는지 더 궁금해해야 한다. 



 그런데 여러 측면과 상황을 알고도 단편적인 이야기를 해댄다면, 그건 멍청함을 넘어 미친놈이다. (굳이 비속어를 사용하는 건, 오늘 생각을 언어로 풀어준 단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글을 읽으며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왜냐하면 잘 모르는 사람에게 오해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릇된 해석을 만들어 어떤 결과를 만들고 싶은 것일까? 왜 항상 그런 사람들은 '피해자'라는 붕대를 둘둘 감고 있는 걸까?


 재미있는 점은 이런 사람들은 보통 본인을 '솔직하다'라고 여기는 점이다. 그런데 막상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게 흥미롭다. 솔직하다: 거짓이나 숨김없이 바르고 곧다.(표준국어대사전) 우리는 '숨김없이'와 '바르고 곧다'라는 단어부터 다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건가? 왜 본인이 드러내고 싶은 부분만 드러내고, 본인이 믿는 바를 정의라 여기며 의심할 생각조차 없는 걸까? 본인이 믿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가고 고민하지 않는 걸까? 심지어 대화를 나눌 의지조차 없다.


 결론적으로 위와 같은 부류의 사람은 앞으로 피하려고 한다. 일방적인 시선으로 오해를 만드는 이야기를 당사자는 없이 여기저기에 풀어놓고, 막상 앞에서는 불만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내 주변에 없었으면 좋겠다. 사실 오늘 내 주변 사람들이 오해를 가지고 나를 바라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함께 찾아왔다. 또 내 능력을 의심하는 불안한 마음도 함께 찾아왔다.


 오늘의 감정을 나누는 편안한 대화에서 질문을 받았다. 


Q. 혹시 어떤 동료가 조심스럽게 너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면 어떨 거 같아?

A. 나는 그 동료에게 진심으로 고마울 것 같아.

Q. 오늘 너의 감정을 만든 상황과는 어떤 점이 다른 것 같아?

A. 아마도 동료라면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리고 그가 나와 함께 상황을 해결하고 싶은 의지와 팔짱 끼고 지켜보겠다는 방관이 아니라 현재 상황을 책임지고 함께 변화를 만들려는 선택 자체에 고마운 마음이 들어.

 

 나부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문제가 생기면 피하기보다 팔짱 끼고 지켜보는 방관자, 감시자가 아니라 해결 의지를 가지고 함께 뛰어들어 충분히 책임지고 변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자. 그리고 오해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사람들과 단단한 관계를 맺자. 그거면 충분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모라는 권위 이면의 무거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