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다시 지역으로 떠나는가?
목포로 내려가는 KTX에서 생각을 정리하며 작성한 글이다. 내가 왜 다시 지역으로 떠나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어떤 욕망을 가지고 떠나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불안함보다는 설렘과 기대감을 한가득 가지고 떠나는 두근거림을 담아보고자 한다. 2019년 3월 21일의 기록.
제주의 생활을 정리하고 파주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낸 지 어느덧 3달이 지났다. 3달의 시간 동안 마음 편하게 쉬었고,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못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하며 지냈다. 마음껏 책을 읽으며 사유했고, 주체적인 삶에 대한 다양한 워크숍을 기획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모아 워크숍을 진행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충분히 쉬고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던 시간이었고, 그간의 마음속 아쉬움을 마음껏 실행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3달이 지난 지금, 나는 목포로, 지역으로 다시금 이주하기로 했다. 제주에는 마음을 나눈 친구들과 함께 이주했다면, 목포에는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동료들을 찾아 떠난다. 나는 목포에서 '괜찮아마을'을 만들고 있는 공장공장에서 기획자로서 함께 일하기로 하였다. '최초가 될 당신에게'라는 채용 공고를 확인하고는 관심이 갔다. 그들이 바라보는 가치와 방향에 공감이 되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원 원서를 쓰고, 과제를 하고 면접을 보았다. 운이 좋게도 그들도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을 알아봐 주었고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렇게 지금은 설렘을 가지고 목포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다시금 지역으로 이주를 결심했는가?
먼저, 제주에서 수도권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제주에서 돌아오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 내가 기획하고 만든 콘텐츠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제주에서 나는 불안했다. 행복하지 않았다. 물론 지난 2년은 체인지 메이커 교육을 함께한 학생들을 처음 만난 날, 별빛 공장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행복한 기억 등 셀 수 없이 행복한 기억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제주에서의 2년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마음을 나눈 친구들과의 공동체는 흔들렸다. 서로의 욕망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또 수입은 일정하지 않았고, 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들은 항상 불안정했다. 식생활은 불규칙적이고 불균형했고 주거지는 안전하다는 느낌보다는 긴장되는 곳이었다. 곰팡이 냄새가 나고, 지네에 물리고, 비가 많이 와 천정이 무너지기도 했다. 이런 일상 속에서 몸과 마음은 지쳤다. 그렇게 소모된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집에 돌아오니 일상이 안정되었다.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집에서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미뤄둔 건강을 챙겼다. 뒤틀린 척추를 교정하고, 비염과 아픈 이를 치료했다. 마음껏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주체성에 대한 생각들을 이어갔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주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일상에 주체성을 뿌리내리게 하는 워크숍을 기획했다. 그중 '일상의 고리 : 루틴'은 워크숍에 필요한 자료도 만들고, 실제로 오픈컬리지 등의 여러 플랫폼을 통해 워크숍을 진행했다. 당장 많은 경제적인 가치가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즐거운 과정이었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충만했다.
그런데 나에겐 지금 상태로 진행하는 워크숍은 분명 참여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지속 가능하지 않다. 나는 누군가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일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불특정 다수에게 전하는 영향력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안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상황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노력이 필요하다.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 우아한 백조의 물속 발버둥처럼 보이지 않는 이면에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사방의 부력이 균형을 이뤄 배가 물 위에 떠있는 것처럼 지속 가능하다는 건 욕망이 균형을 이뤄야 가능하다. 힘을 빼고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떠올라야 한다. 나의 발이 쉬어 가라앉는다면 언젠가 내가 멈추는 그 순간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공동체'라는 결론을 내렸다.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는 욕망, 주체적인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의 이면에는 "주체적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다."라는 욕망이 있다. 결국 나는 주체적인 사람들과 함께 쉬고, 놀고, 일하고, 혁신을 만들며 살아가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주체성의 영감을 주는 일에 관심이 있다. 즉, 사회적 문제 해결의 시작은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이다. '지속 가능하다.'는 욕망에 따라 그 의미가 매우 다르다. 나의 지속 가능함은 풍부한 현금흐름이 아니다. 주체적인 사람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삶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선 반드시 돈이 필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행복을 찾아 떠난다. 나를 한 번의 좋은 경험이 아닌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줄 공동체를 찾아서 떠난다.
결국 실제로 변화를 만들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플랫폼이 필요하다. 구름이 먼지와 같은 작은 티끌에 물방물이 모이는 것처럼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이는 물리적인 공간, 무형의 커뮤니티, 온라인 플랫폼, 상품이나 물건 등 다양한 방식의 형태가 될 수 있다. 공장공장이 만들어가고 있는 '괜찮아마을'은 여러 물리적인 공간의 플랫폼을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공간에 대한 권한을 여러 노력으로 확보했다. 그렇게 '청년들에게 쉬어도 괜찮은 실패 해도 괜찮은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제주에서도 서울에서도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고민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체제에서 돈 없는 청년이 부동산에 대한 권한을 오랫동안 보장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다. 아직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분명 많은 위험 속에서 힘들게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어려운 행보에 참여해보기로 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하게 그려졌고, 나의 관점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고민은 있다. 조직에서 월급을 받는 위치에서 나는 온전히 주체적일 수 있을까? 내가 조직에서 안주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렇게 주체적이지 않은 나를 마주하지는 않을까? 계속해서 나를 들여다봐야겠다. 곪아버리기 전에 발견할 수 있는 기민함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뭐 어쨌든, 나는 괜찮아마을에 왔다. 함께 도전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져 있고, 멋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왔다. 정말로 설렘을 가득 안고 왔다. 어렵고 힘든 일이겠지만, 그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과 장소를 만들어보고 싶다. 이 앞에 무슨 일들이 놓여있을까? 그 막을 열어본다.
목포에 내려올 때, KTX에서 쓴 글인데 이제야 발행한다. 뭔가 한 번만 확인하고 올려야지! 하다가 한 달이 지났다. 이러다 평생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지 못할 것 같아 그냥 발행하기로 했다. 글을 쓰다 매듭짓지 못한 것들이 쌓여가고 있다. 부담 없이 일단 기록을 쌓아 가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