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습관적으로, 의식적으로 적는 모든 이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글을 위해 적절한 인풋을 투여하거나 억지로 글감을 짜내는 그 과정이 나는 어렵다. 사람마다 특별히 귀찮고 어려운 영역이 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그런 듯 싶다.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아직은 양질의 글을 효과적으로 생산하는 일이 내게는 절박하지 않은 듯 싶다.
12월 26일, 곧 있으면 다가올 생일을 위해서 받고 싶은 생일 선물을 골라야 한다. 어떤 이들은 장바구니에 사고 싶은 걸 한 무더기 쌓아두고 월급날만을 기다린다지만, 나는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 크게 없다. 어린 아이 때부터 별로 없었다. 떼를 써본 적도 없다. 뭔가를 갖고 싶다 말해본적도 없다.
생리적인 고통이 없다면 나는 구매의 욕구가 크지 않은 사람이다. 많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더라도 말이다. (애초에 내 세계관에서, 나는 너무 좋은 시기를 좋은 장소에 태어나 과분한 운을 타고난 존재이다. 전체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더라도 너무너무나도 밸런스가 완벽한 삶을 시작해서 30년을 보내왔다. 전인류적인 관점에서, 나는 우리가 그렇게까지 서로와 사회와 현재의 생을 혐오하는 현상의 이해를 넘어 공감까지는 다가가기 어렵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어떤 생에서는 부끄럼 한점 없이 돌을 던질만한 사상일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꽤나 굳건히 주장하고 싶은 내용이다. 라떼는 어쩌구의 문제가 아니라삶의 기회들이너무나도 풍요로워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갖고 싶었던 것들은 정말 괜찮고 화려한 무언가라기보단 오히려 생각만 하더라도 눈물이 글썽여지는, 어릴 적부터 일관되게 변하지 않았던 그 무언가들이었던 것 같다.
무튼 오늘의 글은 왜 그럴 지에 대한 생각이 오랜만에 떠올라서 기록으로 남겨보고자 하는 것이다. 재차 말하지만 이것은 개인 생각에 대한 기록이다. 어디까지가 Original think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러 생각들을 남기고 합쳐보며 관찰되는 일관성과 논리적 모순에서 개인을 해석하는데 더 큰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개념의 정의와 논거를 학술적 근거로 뒷받침하거나 영향력 있는 메신저를 인용하려는 노력이 글의 방향성을 제약하고 피로감을 크게 높이기 때문에, 글의 신뢰도를 담보하지 않겠다라는 선언문과 함께 개방된 공간에서 주저리 써내려가는 지친 심신의 안정감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가 뚜렷하다.)
덕분에 빠르게 읽어내려한 두 권의 책을 모두 읽고서 집에 가지 못할 수도 있지만 괜찮다. 각각 사모펀드와 PM 업무에 대한 책인데, 취업 톡방에서 컨설턴트 분에게 추천받은 것을 바로 주문했다. 여담이지만 책은 나의 구매 목록에서 가장 허들이 낮은 것들 중 하나이다. 카페에서 주문하는 커피 만큼이나. 옅은 지식과 컨셉질의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문헌정보학을 전공하며 책을 더 좋아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책 사는게 쉬웠던 이유는 내 가치관에도 부합하는 선택이라는 깨달음을 얻어 남긴다.
우선 '욕망'이란 '개인의 삶에서 생존의 위기 앞에 피어난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 새겨진 동력원'이라 생각한다. 이는 내가 삶을 살아가는 가치관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 가지 유용한 점을 먼저 밝히자면, 나는 한 개인을 이해하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욕망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서사를 탐구해보라 말하고 싶다. 욕망은 생명체의 본성인 생존에 대한 열망에서 기인하기에 상당히 강력하고 개인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본인의 서사를 깊게 살펴본 적이 없거나, 이를 공유하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행히도 주변의 친한 친구들과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나누기가 쉬웠지만, 나이가 들수록 깊이 있는 대화와 개인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깨닫고 즐거움을 느끼는 빈도가 줄어드는 듯 싶다. (타자에 대한 무의식적인 배척과 삶의 문제들이 더 수면 위로 올라온 탓도 있겠지만서도, 특히 내 삶에서 이성과의 관계에서는 이런 부분에서 만족감을 느끼기 무척 어려웠던 것 같다. 개체가 가진 특이성의 차이도 있겠지만은, 대개 표면적인 현상과 기초적인 감각 수준에서 대화가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게 되는 느낌이랄까. 물론 호기심이 많은 나로서는 무슨 주제던 하하호호 대화하는게 어렵진 않지만, 그 이상이 없는 관계가 크게 기대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내게는 중요하고 깊은 고민이지만 일단은 관계맺는 대상에 따라 선호하는 대화방식이 다르니, 친구들과의 시간도 충분히 가지며 갈증을 채우는 걸로 구분하고 살아보는 중이다. 언젠가 이 실험의 결과에 대해서도 공유할 날이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위 표현의 의도를 하나씩 해체해본다면, 먼저 '개인과 생존'이다. 욕망은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무릇 가지게 될 무언가도 포함하고, 개인의 삶에서 경험한 특별한 순간들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의 욕망에 쉽게 공감할 수도,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특정 욕망의 발현은 확률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든지 사고의 틀을 넓혀보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의 개인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당사자도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 욕망은 앞으로의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갈구해야만 할 것을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타인의 욕망을 이해할 수도 없고 도덕적으로 보장되는 부분도 없겠지만, 그 당사자에게는 정말로 중요한 부분일 수 있겠구나 하는 지점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모든 관계와 인간 행동에 대한 해석이 출발한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끼지만, 나는 어느 집단에서든 한 개인을 이해하고 그 행동 원리를 추론하려는 시도가 자연스럽고 힘들지 않고 재밌다. 학부 수준이지만 심리학을 공부하며 얻었던 인생의 프레임 중 하나는, 인지적 절약을 위한 집단적 분류 시도의 반복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말아야지 하는 것이었다.
결핍은 앞서 말한 개인성에 기인하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공감받기 어렵고, 때때로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는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 부족한 것들이 외부 자원으로 충족될 수 있다는 생각보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한다는 세계관 하에서 내 스스로의 능력 개선으로부터만 궁극적인 충족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있다. 살면서 내 가치관을 형성해온 여러 텍스트들과, 과거의 경험들(ex- 물질적인 풍요가 학생사회에서 개인의 위치를 담보해주지 않았다)이 모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나의 결핍과 욕망인 것이다. 타인의 사례를 상상해본다면 어릴 적 부모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결핍이 갖가지 인정욕, 식욕, 색욕 등 여러가지 욕망들로 분화할 분기점들이 있었을 것이란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대부분의 인간이 대과거의 경험에 대해 fact 수준의 기억 회상이 가능하진 않기 때문에, 전혀 진의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무책임한 주장이기는 하나 과거부터 이런저런 잡생각과 개인기록을 즐겨온 나 한 사람의 삶에서는 반례없이 설명력 높은 해석이 가능하기도 했다. 이 글을 읽고서 나는 아닌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반박할 근거를 찾기 위해 개인의 삶을 되돌이켜보는 과정에서 잊고 있었던 추억이 몇 가지 떠오를테고 그것만으로도 꽤나 기록할만한 하루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간씀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나는 귀찮음을 감수하고서라도 개인기록을 왜 안남기는 지가 정말로 궁금하다. 당장의 수확은 없지만 4~5년 전의 내가 쓴 글들을 시간이 흘러 읽어보는 것은 무척 재밌다. 나이가 들고 더 이상 새로운 뭔가를 쌓기 어려울만한 노년을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얼마나 재밌겠는가. 내겐 간혹 비행기나 기차를 탈 때면 몇년전 이맘때의 기록을 읽어보는 취미가 있는데, 무척 재밌지만 남에게 크게 공감할만한 것은 아니라 추천해본 적은 없다.)
그러면 어떤 결핍과 욕망은 생존과 전혀 관련이 없지 않느냐라는 말을 할 수도 있다. 맞다. 다만 여기서 생존은 현재를 넘어 중장기적으로 한 개체가 삶을 지속영위할 가능성에 대한 담보도 포함하는, 확률적인 개념이다. 문득 모 만화에서 번역되어 인기를 끈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라는 대사가 떠올랐는데, 삶이 시시하면 어떤 인간은 정말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의식적으로 삶의 끈을 놓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가속 소멸의 길로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은 노인의 자기 통제력과 관련된 고전적인 연구들에서부터 얻은 아이디어다.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을 열망하며 에너지원과 번식환경의 확보 너머를 보기 어려웠던 과거를 넘어, 현재의 인류는 가만히 누워있더라도 모든 종류의 욕망을 다 채울 수 있지만 그러한 삶이 감정적인 만족도를 수반하지는 않는다. 감정은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생명체를 이끄는데, 기초적인 욕망 충족이 쉬워진 만큼 그럼에도 더 살아가야만 할 생존 목적을 찾으라 개인에게 퀘스트를 내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내 삶의 재미, 흥미, 비전, 목표 등 여러가지를 요구하며 '게임이 너무 쉬우면 재미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듯듯, 생명체의 삶을 관장하는 어떤 절대적 존재가 있다면 한 인간의 삶이 끝날 때마다 모든 희로애락이 쓰여진 책 한권을 삼키며 흡족하게 입맛을 다시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퇴사 후 긴 시간을 낭비하며 그래도 어떤게 만족스러웠는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지식의 암기 그 자체보다는 맘에 드는 인풋을 지속적으로 투입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소위 '역량'의 누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의 현장에서 하루하루 인풋을 아웃풋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내게 남지 않고 스쳐지나간 문서 수준의 노력들이 많았는데, 이 시기에는 쓸데 없어 보이는 새로운 걸 찾고, 습득하고, 흘려보내고, 또 다시 부어서 한 줌의 체화된 무언가를 남기는 과정에서 큰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게임을 좋아하는 나는 중학생 때부터 판타지라이프를 표방하는 모 RPG게임을 즐겨했고 (마지막 플레이가 1년 전인데, 심지어 연말 프리시즌에 다시 시작할 마음도 있다. 나이가 서른이지만 말이다.) 종종 내 삶을 그것에 빗대어보는걸 좋아한다. 새로움이 없으면 지루해서 기존 유저들이 이탈하기 때문에, 게임이 계속되는 한 새로운 컨텐츠가 생겨난다. 그것이 사냥이든 생활이든 어떠한 '스펙' 기준을 요구하는건 동일한데, 나는 그 안에서 스펙을 키우며 무한한 자유도를 얻고 싶었다. 게임의 초반부에는 스킬을 올리거나 퀘스트를 수행하며 영구적으로 귀속되는 스텟의 비중이 높아서, 지루한 반복들을 어떻게 하면 빨리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무수한 몬스터와 재료를 모으고 스킬 키를 누르는 과정을 통해 캐릭터를 육성했다. 지금은 소위 말하는 노가다(반복성 업무)가 신규 유저들을 피로하게 만드는 만큼 허들이 많이 낮아진 대신, 아이템(대개 고스펙 노가다나 현금성 재화의 투입으로 얻어짐)으로 확보되는 스펙이 더 중요해졌는데 나는 오히려 과거의 게임 플레이가 더 만족스럽지 않았나 싶다. 윈드밀 1랭크를 찍으려 4,000번이 넘게 스킬 키를 눌렀던 걸 생각하면 그 시간에 영어단어를 외우는게 맞지 않았으려나 싶지만... 게임 비즈니스의 특성 상 새로운 아이템이 계속 나오며 기존 아이템의 가치는 떨어지고 새로운 아이템을 얻으려는 노력을 해야하는데, 스킬로 다져진 기본 스펙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심지어 캐릭터가 해킹을 당해서 모든 걸 잃었을 때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이 게임의 생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어떤 부분과 참 닮아있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물론 그렇게 얻어진 스펙으로 항상 신규 컨텐츠를 즐기진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과 교류하고 잉여롭게 풍경을 관찰하고, 쓸데없는(보상이 적은) 퀘스트를 수행하며 게임 세상과 나만의 추억, 상호작용들을 많이 넓혀가는 부분에 집중했달까.
무튼 나는 물질적인 재화에 대한 욕망보다 나 자신을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지에 대한 욕망이 우선시되는 인간이고, 그렇기에 이를 가능케하는 경험재나 책 등의 소비에 대해서 열려있는 편이다. 욕망의 층위를 나눠본다면 그렇게해서 얻고 싶은 소소한 추억이나, 본질에 대한 달성 등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깊은 욕망들이 추가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이런 어른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텍스트들, 그리고 내 자신의 생각과 기록하는 습관이 영향을 미쳤으며 남이 들었을 때 재미는 없겠으나 앞으로 이 인간이 선택에 순간에서 무엇을, 왜 하게 될 지를 예측하고 과거의 선택을 평가진단하는데는 꽤나 도움이 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