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uiis Nov 09. 2024

0004. 그냥이 왜

나의 어떠한 면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한 짧은 생각

언젠가 만났던 사람에게 블로그를 보여준 적이 있다. 

상대방도 매달 꾸준히 블로그를 쓰는 사람이었기에 내가 블로그에 남긴 글이 있다는 사실이 내심 흥미로웠나본데, 나름 잘 읽히는 글을 독창적으로 쓴다는 피드백을 종종 받아왔던 만큼 약간은 기대감에 젖어 설레는 마음으로 링크를 전달했다.



그런데 돌아온 피드백은 적잖이 의외의 반응이라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이 많냐고, 너무 생각이 많아서 걱정되어서 엄마한테(?) 진지한 고민거리라고 이야기도 해봤다고. 정말로 생각도 못했던 반응에, 그동안 쌓아올린 내 세계관이 다소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알고보니 상대방은 '그냥' 평소에 깊은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싫어한다고 했고, 세상을 복잡하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과는 본인이 잘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했고, 글을 쓰거나 상상하는 일이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약간은 속상하기까지 했다. 글을 나 자신을 이해하고 성장하기 위한 수단이면서, 과거의 나를 돌이켜보면서 추억할 수 있는 이정표와도 같은 중요한 수단이었다. (아무런 글이나 사진을 남기지 않은 2021년 10월 9일의 하루를 복기해보라, 가능하겠는가?) 다만 내가 봤을 때는 상대방의 블로그에도 현상에 대한 단순 서술을 넘어선 견해가 충분히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더욱 의문이었던 부분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다름'은 여러 부분에서 빚어질 차이의 일부였을 뿐이고, 결국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굉장히 큰 덩어리의 차이를 그 때 직면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는 크게 몰아쳐서 관계를 뒤엎을만한 무언가 말이다. 평소에도 다양한 주제에 생각이 많은 MBTI 'N' 성향이었던 나는, 그 뒤로 꼭 나와 같은 'N' 성향의 인물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했다. 

(여담이지만 모교인 연세대학교 심리학과는 인지분과가 중심이 되어있는 만큼 MBTI를 유사과학으로 생각하는 정도가 더 큰 것 같다, 하지만 MBTI는 BIG-5보다 더 크게 세상을 바꿨다고 생각하며 이 주제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더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나의 바램이 일종의 플래그처럼 작용하였는지, 나는 기어코 또 다시 'S' 성향의 사람을 사귀게 되었다. 

한 가지 다른 부분이 있다면 내가 생각하고 적어내려가는 많은 이야기들을 상대방은 '그냥' 좋아해주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다름'을 가진 사람이 좋다고 했고, 그 외에 가치관이나 도덕관 등이 일치하는 만큼 특정한 부분에서의 차이를 흥미롭게 느껴줬던 것 같다. 

(물론 크게 생각하지 않고 감각 중인 현재에만 몰입하는 점은 그녀도 동일하긴 하다, 이러한 성향에 대해 개인적인 선호는 있으나 분명한 장점도 있기에 가치판단은 자제하고자 노력 중이다.)



같은 성향에 대해 두 인물의 견해가 상반되었지만, 흥미로웠던 점은 둘 다 말머리에 '그냥'이라는 단어를 덧붙였다는 점이다. 

심리학에서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떠올리는 감정이나 견해는 생리적인 반응에서 출발하며, 그 원인을 찾으려고 후술하는 표현을 '작화'라고 한다. (내가 대학에서 배워 인생을 바라보는 frame으로 쓰는 몇 안되는 개념 중 하나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어떤 면을 좋아한다는 것은, 모두가 본질적으로 '그냥'에 가깝고 why를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 이유를 찾아 고민해본 나는 'why'가 정말 중요한 사람이다. 

오죽했으면 나를 담당했던 리더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이 'why가 이해되기 전까지는 실행이 멈춰 있으나, why를 어떻게든 스스로 찾아내고 그 뒤로는 한없이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코멘트를 했을까. 나는 "왜?" 라는 질문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아왔고, 일의 인과와 본질을 파헤치는게 너무나도 흥미롭고 재밌고 자연스럽다. 그렇기에 내가 "왜?" 라고 했을 때 "그런걸 왜 물어보는데?" 라고 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상황을 편하게 느낀다.



그럼에도 나는 '그냥'이라는 대답이 한 사람에 대해서 상당히 중요하고 많은 부분을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가끔 일터에서 why라는 질문들을 계속 스스로에게 던지다 보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상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끌리는 쪽으로 선택을 내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냥 내린 그 선택들이, 내게는 썩 나쁘지 않고 흥미로운 경험이 되고는 했다. 마치 내 안의 작은 아이가 외치는대로 따라가듯이. 뭔가를,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어떠한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나 자신을 설득시키려는 일종의 행위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100%가 맞지 않음에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관계를 발전시키고 이어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냥 좋아서 그런거지. 매 순간 본능에 충실하다보면 길을 잃어버리겠지만, 가끔은 머리를 비우고 그냥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도 싶다.



Jeju, 2024. 10. 12 (17:1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