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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on A Oct 13. 2024

<파편>(2024, 김성윤)

강렬한 장르의 에너지로 의미 있는 목표에 도달하다.

*스포 있습니다*


           2013년 4월 보스톤 마라톤 대회 폭발 테러 사건에서 사용된 폭탄은 여타의 폭발물에 비해 성능은 떨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폭탄 내부에 가득 찬 베어링이라던가 못 같은 쇠붙이 파편들로 인해 대량 살상의 효과를 노린 악랄한 것이었다. 이렇듯 주변으로 튀어가는 ‘파편’으로 인한 피해는 정확히 가늠하기가 어렵다. 마라톤 대회 당시 선수로 뛰었거나 폭발물이 든 가방에서 제법 떨어져 있었어도 많은 사람들은 신체 부위를 손실하는 극단의 피해를 입었다. 그 어떤 보상을 한들 그들의 피해를 다시 되돌릴 수가 있을까? 두 다리를 잃은 선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트롱거>(2019)같은 영화가 나오기도 했지만, 테러를 격은 당사자들의 심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저 지켜보고 그들이 그 아픔을 안고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끝까지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


 서론이 길었다.    


  준강이 준희를 데리고 기수를 찾아갔을 때, 문득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엄마는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가고 사람을 죽인 아버지는 1g의 반성도 없이 아이들을 겁박하는데 도대체 준강이는 짧다면 짧은 15년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왔기에 그렇게 그 시간에 기수를 찾아갈 수 있게 되었을까.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 어렴풋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 했어요.’ 새로운 세대는 언제나 기성세대를 부정한다. 그들이 옛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해도 스스로는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런데 준강은 정말 정확하게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지 않는다. 어른들이 결코 하지 못한, 아니 하지 않는 길을 간다.

 이런 드라마에는 정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따뜻한 위로도 치명적인 상처가 되고 강인한 독려도 폭력으로 다가온다. 그 진위가 의심될 정도로 감독은 준강과 기수 주변의 모든 사람의 행동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게 만든다. 만약 이러한 상황에 놓인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의 선의를 내어줄 수 있을까. 감독은 아주 어려운 숙제를 강력한 에피소드들로 집요하게 채워간다. 하늘 아래 수많은 집, 아니 수많은 가족 속에 숨어 있는 사연을 우리는 오롯이 이해할 수 없다. 준강이 친구들을 피해 뛰어다니는 골목마다 그를 위로할 수도 아니면 비난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을 만날지 알 수 없는 이 미로 같은 골목을 급박한 시선으로 함께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용서를 구해야 하고 아픔을 이해받아야 할 정확한 방향을 잃어버리게 된다.

  영화는 다소 폭력적이지만 보여주고 싶은 결말을 위해 지난하고 힘겨운 에피소드를 안고 달려간다. 사건이 일어나고 누군가를 잃는 고통스러운 일이 벌어지면 그것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다. 평생 그 흉터를 바라보며 피해자는 이어지는 삶을 견뎌내야 한다. 그런데 가해자의 주변이라는 생각하지 못한 파편의 숨어있던 상처도 존재한다. 피해자의 가족으로 남은 이와 가해자의 가족으로 남은 이는 날카로운 파편 더미에 손상된 인생에 이유도 모르고 빨려든다. 이 영화는 사건의 당사자들이 아닌 주변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폭력적인 주변에서 살아남기 위한 준강의 선택은 결코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준강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기수도 결코 옳은 행동이 아니다. 어른들의 불행한 사건에서 두 사람이 만나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런데도 강력하게 준강의 사과를 끌어내는 이유는 어지러운 현실에 대한 감독 나름의 회한일 것으로 생각된다. 어른들의 독선적인 이유는 결코 옳은 방향을 찾아가지 않기 때문이고 그 옳은 방향이란 진부하게도 진심 어린 사과와 진정하고 통렬한 반성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불편해지는 화면이 이어지고 결론은 이미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영화를 이끌어가는 감독의 선택은 불편해지는 마음의 숨을 잠시 고르게 한다. 장르의 힘을 빌려 결론으로 달려가는 강렬함 속에 준강의 선택을, 아이들의 만남을, 기수의 구조신호를 우리들은 이렇게 목도한다.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를 위해 어떤 장면을 보여줘야 하는지 알고 달려가는 힘은 장르를 이끌 강력한 에너지가 된다. 두 아이 혹은 세 아이가 만들어 내는 결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작금의 현실에 너무도 필요한 결말임을 감독은 굳게 믿고 뚝심 있게 영화를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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