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한살림에서 공급된 먹거리를 가방에 욱여넣고 광주 가는 버스를 타러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함께 광주로 향한 언니와는 한집에서 살면서, 서경식, 김상봉 두 선생님이 쓴 <만남>이란 책을 함께 읽어갔다. 내려가는 길 버스에서 보려고, 아이폰에 <오월愛> 다큐영상을 담아갔다. 광주에 도착하기 1시간 전쯤, 고속버스 안 TV에서 <오월, 그녀>가 방영되었는데, 내용이 묘하게 대치되었다. 8년 전 다큐에 나온 인물들이 비슷한 표정으로, 8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들을 나열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5.18 사태를 겪은 이후로 “더 사는 삶에 대해 미련이 없다.”는 말을 덧댔다. 체념과 자기 고백의 경계에서 고통당한 사람들의 고통을 증명하는 언어를 듣고 있자면, 이내 마음이 뻑뻑해진다.
"고통이란 같이 겪을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어떤 고통이라도 혼자 겪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고통을 같이 겪는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겁니다. 타인의 고통이 지니는 타자성을 보존하면서도 그 단절을 어떻게 무관심이 아닌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데, 저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배우려는 자세, 이 두 가지가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서경식 김상봉, <만남> 중에서
흙날 아침, 망월동 묘지를 찾았다. 곳곳에 묻힌 열사들의 삶과 말. 김남주 시인, 백남기 농부님 묘 앞에서 몸도 마음도 오래 머물렀다. 5월의 냄새 깊게 스몄던 상무관 앞에서 순례길 함께한 길벗들의 작은 소리가 어울렸다. “당신의 장례를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생동중학교 한 학생이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책의 일부를 노랫말로 넣어 만든 노래였다. 읊조리듯 흥얼거리는 17살 학생의 작은 소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해날 오후, 다시 찾은 망월동에서 “생명 평화 일구는 바람 불어”오길 함께 노래했다, 무명(無名). 이름 없는 누군가의 묘, 앞에서 경한 아저씨가 떠올랐다. 2014년, 송파에서 세 모녀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유서를 쓰고 자살한 두 달여 만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도처에 널린 죽음들 앞에, 아파트에서 활동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이 깊어졌고, 그해 살아서나 죽어서나 혼자였던 이들을 만나자는 다짐을 했다. 그렇게 만난 분이 경한 아저씨였다. 영등포 쪽방촌에서 사시다가 돌아가신 지 며칠 뒤에 냄새로 시신이 발견되었고 동료들과 나는 아저씨의 장례를 지켰다. 동료들과 시종 고민했던 건, 아저씨는 죽기 전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라는 질문이자 의문이었고, 우리는 죽은 이들의 말, 살아있으나 죽은 듯 숨죽인 사람들을 말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때 깨달은 사실은 죽은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거였다. 살아있는 게 기득권이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관을 실은 청소차, 5월 29일, 항쟁 기간 동안 상무관에 안치됐던 시신들은 아무런 장례절차도 없이 입관되었고, 청소차에 실려 망월동 묘지로 옮겨졌다.’... ‘망월동 안장, 5월 29일, 망월동에서는 각 동에서 동원된 인부들이 시신을 매장했다. 눈 뜬 채 죽어간 넋을 위로할 예식도 망자를 떠나보내는 구슬픈 노래도 영혼들의 안식을 기원하는 기도도 없었다. 다만,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오열만이 망월동에 울려 퍼졌다.’... ‘상무관 분향소, 상무관으로 운구된 시신들은 먼저 무명천을 덮어 주었는데 검붉은 핏자국이 배어 나왔다. 시신에는 부패되지 않도록 방부제가 뿌려졌다. 입구에 설치된 분향대에는 향이 피워졌고 수많은 시민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분향했다.’... ‘무명열사 묘비, 2014년 현재, 국립 5.18 민주묘지에는 행방불명자의 묘가 66기,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무명 열사의 묘가 5기 남아 있다.’
동료들과 영상을 만들면서 참 많이 싸웠다. 기획과 연출의 역할이 싸울 때마다 바뀌었고, 촬영분을 편집 구성하는 과정에서 많이 싸웠다. 내부 설득이 되어야 외부 설득도 되는 것이 마땅한데, 내게는 설득되지 않으나 다른 동료의 구성과 내용이 그 설득의 권위를 차지할 때마다 삐죽 대는 심보를 가졌다. 몇 번씩 무너지는 편집 구성안을 다시 써야 했을 때 제발, 제발 하는 마음으로 아파트를 찾아갔는데, 간발의 차이로 104동 8층에서 떨어진 아저씨의 시신이 구급차에 이송되는 걸 보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이걸 어떻게 구성에 담을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작업실에 돌아와서 고작 뱉은 말은 ‘죽지 마'란 말 따위였다. 그날 집에 돌아가면서 내가 이 일을 한다고 다짐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도시 한복판의 무연사, 고독사 이슈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영상이라는 매체를 연출하기 위함이었는지, 그 둘 다가 맞는지, 아니면 그 둘 다도 아니었는지... 그렇게 관계 안에서 피해의식이 켜켜이 쌓였고, 동료들의 말이 말로 안들 릴쯤 이 일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불안을 상쇄할 수 있는 관계가 절실했고, 일단 불안이 해소되어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동체와 함께 성서를 읽고 해석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에 메이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평화를 일구라는 명제는 납득하기 쉬웠다. 이제는 돌판에 새긴 법이 아니라, 마음에 새긴 법이라니,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명제에 동의했다고 해서, 격하게 공감한다고 해서, 내 삶이 그렇게 살아지는 건 아니었다. 매 순간이 결정인 일상에서 이게 네 마음인지, 내 마음인지, 저 마음인지, 이 마음인지, 네 마음을 추측한 내 마음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 머리 속에 무성했다. 이미 몸에 새겨진 뼛속 깊은 노예 의식, 비교하는 마음, 자기검열, 위계질서, 가치판단이 버무려져, 그 뜻 헤아려 살기 쉽지 않았다. 결정의 중심에 자기애에 빠진 내가 있는지, 나를 비우고 선을 쫓는지는, 내 과거와 상처를 알고 돕는 냉철한 벗이 없으면 분별하기 어렵다.
'편견과 싸우려는 의지는 어째서 오히려 그 편견에 배어 있다는 확실한 표시가 되는가? 하나의 편견과 싸우려는 의지는 필연적으로 강박관념에서 비롯된다. 즉, 그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결실을 맺지 못하는 노력이다. 그런 경우 오직 주의력의 빛만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주의력의 빛은 논쟁적인 의도와 양립할 수 없다. ... 오직 주의력이, 너무도 충만해서 ‘나'가 사라져 버릴 정도의 주의력이 필요하다. 내가 ‘나'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서 주의력의 빛을 거두어들여 우리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것을 비출 것. … 주의력을 훈련시켜서 그러한 행동이 가능하게끔 준비하는 것이 교육의 유일한 목적이다.'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중에서
‘자꾸 공부하는 이유, 자기 계발과 역량을 강화하는 이유는 내가 나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귐을 통해 얻는 배움을 누릴 공동체가 파괴된 구조에서, 자아가 강화되는 방향으로의 공부가 아닌, 지금 여기서 내가 풀어야 할 과제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선생님의 말을 떠올린다. 닿소리와 홀소리, 우리말 공부로 시작해, 1~100까지 덧셈 뺄셈의 반복 훈련 지나, 산으로 들로 숲 생명들 만나며, 정말 내게 필요한 공부가 무엇인지 주목하게 되는 시절이다. 내가 발 딛고 손 닿는 곳에서의 깊은 사귐이, 대안을 누리는 동시에 일구는 삶이다. 그렇게 연결되어 살아가도록 돕는, 나를 객관화시켜주는 관계야말로, 내게 일상을 밀고 가는 힘, 이다.
<일상을 밀고 가는 힘> 연재를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