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여름에는 달랏 한달살기를 추천합니다.
어느 기획자의 라이프스타일 전략
나는 전략 짜는 기획자다. 그래서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늘 만들어 가는데, 2년 전에는 자연 속 단독주택에서 살고 싶어서 거제도로 이사를 갔고, 매일 아침 새소리와 함께 눈 뜨고 통창으로 숲숲한 나무들을 보며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사랑하는 그 집이 매우 오래된 집이라 난방비가 정말 많이 든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나는 추위도 약하고 더위에도 취약한 몸뚱이를 가진 탓에 첫 해에는 뭣도 모르고 난방을 펑펑 틀었다가 한 달에 50만 원이 넘게 나온 적이 있는데 그다음 해부터는 아끼고 아꼈더니 방 밖으로 아얘 나오질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아 이렇게 추울 때는 차라리 어디 따뜻한 동남아에서 한 달 정도 살고 오면 어떨까?" 란 생각을 했었고 작년 겨울 초입 역시 오들오들 떨다가 안 되겠다 가자!! 하고는 태국 치앙마이에서 1개월을 살고 왔다. 그리곤 가장 추울 때 출국해서 봄기운이 살짝 스며드는 시기에 입국했다. 그리고는 유레카를 외쳤다! 이거다!
그럼 더울 때는 어디로 가지..?
태국 치앙마이의 겨울은 그리 덥지 않은 선선한 날씨였고 물가도 낮아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금액으로 호강하다 돌아왔다. 그 기억이 너무 좋았어서 그럼 이번 여름은 물가가 낮으면서도 기온이 시원한 곳을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이 베트남의 달랏 지역이다. 동남아 대부분은 한국 여름 시즌과 함께 같이 더울 수밖에 없는데, 그중에서도 베트남의 달랏은 해발 1500미터의 고산지역이라 평균 기온이 18~25도 안팎이라고. 유튜브 쇼츠에서 추천하는 걸 보고는 에어비앤비를 검색했더니 대부분 한 달 렌트 비용이 30~50만 원 사이었다. 세상에! 그래서 결정했다. 이번 여름은 베트남 달랏에서 한 달을 보내자고. 나는 코로나 이전부터도 재택으로 일해왔는 데다. 또 관련한 일들이 타이밍 좋게 들어와서 7월 중순 베트남 달랏으로 출국해 딱 8월 말 한국으로 들어왔다.
시원하다 못해 추운 베트남 달랏.
달랏이 아무리 우리나라 가을 날씨라곤 하지만, '설마 동남아인데 춥기 까지야 하겠어..?'라고 생각했던 나. 하지만 공항에서 내린 달랏의 밤 기온은 정말 쌀쌀했다. 주변에 달랏을 갔다 온 사람들이 '긴팔 꼭 챙겨가라 했던 말'을 무시하지 않았던 나를 칭찬한다... 가끔 비 오는 밤은 추워서 털옷을 입고 자기도 할 정도였다. 그래도 너무너무 행복했던 건 덥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침 내가 달랏에 도착하니까 한국은 불지옥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달랏은 마지막 베트남 왕의 별장이 있는 피서지인 만큼 서늘한 날씨 하나만큼은 알아줘야 한다.
이 가격 실화인가요?
여름의 달랏은 우기여서 습도가 높다. 유튜브의 누군가는 습도가 높아서 너무 싫다고도 하는 걸 봤는데, 하지만 가을에 비가 와봐야 여름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되지 않는가. 거의 매일 비가 왔고, 가끔 맑은 날이 있었는데 오히려 나는 흐리거나 비 온 상태의 온도가 마음에 들었었다. 더위를 피해서 간 거였으니까. 그리고 날씨뿐만 아니라 저렴한 물가가 정말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는데 내 체감상 저렴한 곳은 한국 물가의 1/10 정도였던 것 같다. 커피는 700원, 쌀국수는 천 원, 저렴한 숙박은 1만 원~3만 원 대. 하루 세끼에 커피 2잔을 마셔도 하루 평균 만원 정도 썼던 거 같다. 특히 숙소 뽑기를 정말 잘했는데 첫날 간 곳은 너무 유니크한 이탈리안 감성의 숙소였고 내 또래의 호스트들이랑도 친해져서 덕분에 한국인은 모르는 핫플을 많이 알게 되었다.
베트남 달랏은 아직 외국인이 많은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다. 그래서 아직 타 유명 관광지에 비해 물가가 저렴하고 외국인이라고 바가지를 씌우거나 하는 게 없다. 어딜 가나 친절하고 특히 한국 사람인 걸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해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여기서도 한국 인기는 꽤 높은 거 같은데, 오자마자 사귄 현지 친구 생일파티에 우연히 갔다가 2차로 가게 된 가라오케에서 이 친구들, 빅뱅의 '거짓말'이랑 원더걸스 'Tell Me'를 한국어 가사로 불렀다.(반면 최신곡은 모르는 듯..?) 어떤 친구는 쿨의 아로하를 열창하더라는.. 아주 재밌었다. 나 하나쯤 추천 글 쓴다고 한국인이 엄청 많이 가진 않겠지..? 이 물가가 오르지 않길 바랄 뿐이다.
여행지가 아닌 전략적 선택지
한국으로 들어왔을 직후에는 아 이 정도면 불지옥은 넘어간 온도겠구나 싶었다. 물론 추분이 지났을 때까지도 가을날씨가 아니라는 상황이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한국 여름의 온도가 앞으로도 계속 올라갈 예정이라면 나는 매년 여름에는 달랏을 올 것 같다. 솔직히 나만 알고 싶긴 하지만, 뉴스에서 말하듯 전 세계 기온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고 자연재해가 빈번해지고 있는 걸 몸으로 체감하는 지금이 아닌가.
현재 11월 한참 단풍이 들어야 할 시기에 단풍을 보기 힘들어졌다. 날씨와 환경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이런 타 지역 한달살이는 단순히 여행지 추천을 떠나 어쩌면 앞으로는 생존과도 연관된 고민이자 선택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직업의 특성상 남들보다 변화에 민감하고 아직 다들 안 할 때 먼저 시작하는 편인데 기후 변화에 관하여 난 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날씨의 변화는 산업 전반, 일의 형태 등 우리 삶의 여러 것들을 바꾸어 나갈 것이다. 어쩌면 향후 몇 년 이내 이상기후를 피해 다른 나라로 피신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신조어가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 달랏은 여건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불지옥 탈출구가 될 것이고 짧은 여행으로는 볼 건 별로 없지만 날씨와 물가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피서지라 생각하며, 모르는 분들이 많기에 한 번은 알고 가면 좋을 여행지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