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큼은 안 할려고 한게 티가 나는 영화
<헌트(Hunt)>가 개봉했다. 배우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는 <미성년> 다음으로 본다. 각본까지 배우 이정재가 썼다고 해서 정말 궁금했는데, 최근 개봉작들 중 <헤어질 결심> 다음으로 볼만한 영화가 아닐까 싶었다. 거두절미하고 리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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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트는 쿠키 영상이 없습니다.
<헌트>는 1980년대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을 둘러싼 두 남자의 대결을 그린 영화다. 영화의 배경 특성상 자칫잘못하면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메세지를 담을 수도 있는데, 기묘하게 피하여 철저히 두 캐릭터의 욕망에만 집중해 '모두까기' 형태를 취했다.
<헌트>는 배우 이정재가 그동안 남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일명 뻔한 '알탕' 영화에서 '이것만큼은 절대 안하겠다!'라는 게 드러난 영화다. 흔히 '선수입장'이라고 표현하는 어줍잖은 첩보 장면도 없고, 밑도 끝도 없이 정의로운 주인공, 그런 주인공의 돌발행동을 윗선 핑계대며 막는 상사, 빌런에게 한판 지고 심기일전해서 다시 반전으로 이기는 전개 등등 뻔한 공식은 하나도 없다.
흥행 공식이라고 불리는 그런 요소들을 드러내고 캐릭터를 완성하고 개연성을 완성해나가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뻔하지 않으면서도 개연성을 갖추고, 영화만으로도 관객이 충분히 전개와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 영화다.
둘은 밑도 끝도 없이 정의로운 주인공이 아니다. 박평호(이정재)는 그냥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남한의 대통령을 죽이고자 하는 북한의 첩자이고, 김정도(정우성)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학살을 잊지 못해 남한의 대통령을 죽이려는 남한의 군인이다.
둘은 비슷한 힘의 크기로 영화 내에서 팽팽하게 대립한다. 이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두 개의 원동력, 즉 첩보가 누구냐는 것과 대통령 암살이 성공할 것이냐하는 문제에 둘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스토리를 리드한다.
보통 친절한 영화는 지루하거나 장황한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헌트>는 군더더기를 영화에서 모두 덜어내고 딱 필요한 부분만 꼼꼼히 담았다. '연극의 1막에 등장한 총은 3막에서 반드시 발사된다'는 체호프 법칙을 잘 따른 영화다.
왜 이 장면이 나올까? 왜 이 장면을 등장시켰을까? 하는 고민들은 영화를 따라가면 해결된다. 러닝타임을 허투르 쓰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가 쫀쫀한 개연성을 가지면서도 캐릭터들을 충분히 설명해주고 그러면서도 장황하지 않다.
시원시원한 총기 액션도 볼만하다. 보통 총기 액션 장면에서는 캐릭터가 얼마나 멋있는지 보여주기 위한 꾸밈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꾸밈없이도 시원시원하게 쏘고 넘어가니 지루할 틈이 없다. 어차피 두 캐릭터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니 멋있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마스크가 이미 멋있다...
영화 속 배경음악도 찰진 전개에 한몫한다. 박평호와 김정도 둘다 다른 이유로 대통령 암살을 꾀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마치 시곗바늘의 초침 소리를 흉내낸듯한 배경음악이 나오는데 이 덕분에 굳이 화면 전환을 빠르게 하지 않아도 긴박한 상황과 두 인물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각적으로 와닿는다.
<헌트>의 또다른 매력은 주요 배우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이것만큼은 안하겠다'가 보이는 영화라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동안 뻔해보였던 배우들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대표적으로 배우 황정민이 연기한 캐릭터 귀순한 북한 파일럿이 그렇다. 배우 황정민의 연기는 <베테랑> 이후 참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순전히 각본과 감독의 탓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스터 에그 찾아내듯 특별 출연한 조우진 배우, 김남길 배우, 주지훈 배우 등을 찾는 것도 작은 재미였다.
다만 아쉬운 점은 '조직 내 스파이를 찾는다'는 홍보 메세지 때문에 둘의 아주 치밀한 심리전을 기대했는데 이 둘이 조직 내 첩자를 가려내는 방식이 고문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시대상을 드러내면서 두 인물 모두 대통령 암살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숨기기 위해 상대방이 첩자여야만 하는 절박함이 잘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고문이라는 방식을 반드시 택했어야 한다면, 이는 홍보 메세지의 잘못이다. 뭔가 고문이라는 방식 자체가 아쉽다기 보다는 홍보한 내용 때문에 기대한 게 있는데 좀 달라서 아쉬웠다.
또 다른 아쉬운 점은 대사 전달력이다. 총기 액션이 전개되거나 외국인 배우가 하는 한국말들이나 사투리가 좀 섞인 대사들 전달력이 너무 떨어졌다. 되감기해서 다시 듣고 싶을 정도였다. <한산>의 경우 해전 장면에서 해전 장면 속 감각은 살리되 대사 전달력을 위해 자막을 넣었는데 그랬으면 어떨까 싶었다.
최근 <외계인>이 폭망해서 영화관을 역시 가면 안되는 건가, 라고 생각했는데 <헌트> 덕분에 즐거운 영화관 나들이를 했다. 제발 <헌트>같은 영화가 좀 많이 나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