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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수 Sep 10. 2021

아카이브

사랑하는 태도를 유산으로 남기는 방법에 대해

  거의 매 글마다 끈질기게 언급하고 있는 오디오 매거진 <조용한 생활> 8월호의 인터뷰 코너에는 여느 때와는 달리 두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대개 김혜리 기자가 면밀히 감지할 수 없었던 다른 직업의 세계를 두 시간 남짓 촘촘히 음미해보는 측면이 강한데, 이번에는 세대가 다른 두 영화감독의 만담이었다고나 할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의 교수로 재직하는 김홍준 감독과 그의 제자이자 영화 <애비규환>으로 데뷔한 최하나 감독이 나와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세대의 다름은 얼마나 다양한 매체를 친숙하게 대하며 자라왔는지를 결정짓는 썩 중요한 요소일 것이고, 각자가 영화를 처음 접하고 가닿는 과정에서 흘러나온 생각들을 얘기하는 인터뷰였다. 예술이거나, 산업이거나. 두 가지 갈래로 분류될 수 있는 영화라는 거대한 세계 최전선에 서있는 사람들의 대화라는 점에서 재밌는 만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공통된 세계  안의 종사자로서 영화를 사랑하는 모습과 태도를 보여주고 물려준다는 점에 큰 매력을 느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이, 최하나 감독이 김홍준 감독의 명언을 아카이빙 하는 "김홍준 봇" 계정을 트위터에 개설해 업로드했다는 점이었다. 그게 실제로 영화인들 사이에서도 번번이 언급돼서 당황스러웠다는 최하나 감독과, 후에 봇 계정의 존재를 알게 되자 그를 자꾸 의식하게 되었다는 김홍준 감독의 차이가 아주 웃겼다. 수업 시간에서 날린 웃기거나 웃기지 않은 얘기들을 아카이빙 하는 학생이 있다는 건 정말 귀한 우연이다. 김홍준 봇 계정을 구글링해 쉽게 찾았고, 그걸 보면서 교수자가 가질 수 있는 위트에 대해 생각했다. 좋은 말도 너무 많고, 무엇보다도 웃긴 말들이 너무 많아서 지하철에서 앉아 가며 끅끅댔다. 곱씹을수록 좋아서 캡쳐를 마구 했다. 살다가 다른 학교의 교수님을 흠모하게 될 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걸 보면서 나는 자연스레 우리 과의 교수, 프로페서 육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두 분 다 감독이자 한 대학에서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더군다나 김홍준 감독의 영화 <장미빛 인생>의 각본을 맡았던 사람이 육 교수님이었다는 점에서 잠깐 케빈 베이컨의 6단계 법칙이 생각나기도 했다. 여섯 다리만 건너면 원하는 사람과 맞닿을 수 있다는 그럴싸한 가정 말이다.

육 교수님의 영화적 세계의 많은 부분은 코미디로 가득 차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끼리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자조적인 유머인 동시에,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농담. 교수님의 영화들이 그렇듯, 교수님도 거의 대부분 그렇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 치명적인 지점은 엄청 재밌진 않다는 점이다. 이럴 땐  나 스스로를 힘들여 만든 웃음에 잘 안 넘어가는 편인가 보다, 생각하는 게 여러모로 편하다. 혹여 교수님과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을 때쯤에 우리는 높은 확률로 생맥주를 많이 마시고 있고, 그 상황에서 그런 얘기를 꺼냈다가는 괄괄한 목소리로 한 소리 들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귀에서 피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교수님이 보셔도 괘씸하게 생각하지 않으실 만큼만 적겠다.)


  이제는 계정 주인의 졸업으로 더 이상 명언을 실시간으로 채집하기 어려운 김홍준 봇 계정의 뒤를 이어 김홍준 아카이브 계정이 새로 생긴 것처럼 보인다. 명맥을 이어나가는 명언 수집의 사례를 우리 과에 적용해 생각해 보다가 관뒀다. 우리의 교수님은 안타깝게도 아카이빙 계정을 운영할 만큼의 명언과 농담을 지어내실 수는 없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대개 교수님이 떠올리셨을법한 명언은 누군가의 청탁에 의해 쓴 칼럼에 들어가 글의 클라이맥스에서 쓰일 것이고, 교수님의 웃음 코드에 딱 맞는 농담은 대개 당신의 영화에 쓰일 대사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그저 교수님이 수업 시간의 말미에 종종 보여주는 당신의 칼럼에 함께 첨부된 하두리 스타일의 셀카 사진에만 푸핫! 하고 반응하는 정도로 멈추는 게 좋겠다. 발언 아카이브 계정에 대한 생각을 접고 사제 간의 인터뷰를 다시 재생하며 그 자리에 교수님과 나의 모습을 잠깐 대입해보기도 한다. 기막힌 농담은 안 하는 교수님과, 감독의 꿈까지는 꾸지 않는 내가 어딘가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모습. 상상해보니 술 없이는 썩 유쾌한 조합은 아닐 것이라 확신하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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