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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수 Mar 09. 2020

우리가 겨우 소망할 수 있는 것

불확실성의 미로를 탈출하기 위해

  전염병, 확진자, 양성 판정.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귀에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단어들이 마냥 낯설지만은 않다. 우리에겐 메르스도 있었고, 신종플루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사스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번에 들려오는  단어들의 영향력과 그들이 선사하는 공포감은 예전의 것과는 훨씬 다른 듯하다. 단순히  바이러스가 가지고 있는 치사성을 떠나, 우리의 생활 속에 더욱 촘촘히 침투하여  많은 것들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아주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실한 그 수많은 것들을 통칭할 수 있는 단어가 딱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아마 "일상"이라는 말로 거의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의 창궐은 우리가 응당 누리던 일상을 거의 빼앗아갔다. 나아가 이전에 고수하던 어떤 삶의 방식들을 전부 바꿔놓았다. 매년 우리에게 고통을 주던 미세먼지를 막기 위해서가 아닌 비말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야만 했고, 그 마스크를 사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줄을 서야만 했다. 자욱하던 공기 속에서도 봄을 즐기기 위해 길을 나서는 많은 사람들의 자취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런 미묘한 변화와 부재들이 모이자 비로소 코로나19의 파급력에 대해 체감하게 된다. 여태 우리가 재난들을 맞이했던 모습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 급작스러운 사태에 큰 책임이 있는 한 종교에 대해 자연스레 원망에 가까운 적개심을 품게 된다. 그들의 존재와 그들이 보이는 온당하지 않은 태도에 화가 만희 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을 잠시 뒤에 두고 더 많은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에 더욱이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그 모습들이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결말을 앞당기는 노력이지 않을까 싶다.


여러 분야에서는 작금의 사태에 대한 수많은 의견들을 제시하고, 그를 기반으로 무수히 많은 칭찬 혹은 힐난들을 던지고 있다. 그것들은 더러 유용하거나 무용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이나 짜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혹여나 후자에 해당하는 정보가 우리의 눈과 귀를 잠식하며 언짢아질 때를 만나게 된다면, 혼자만 들릴 법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욕을 한 마디 내뱉는 것이 여러 모로 도움되는 일일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다시 함께 살아가는 방법과 규칙들을 도모하는 데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지켜나갈 수 있는 건 다만 서로의 안위를 위협하는 만일을 주의하는 일일 것이다. 사소한 불편을 통한 배려가 모두를 생존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들어온 우리가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지나칠 수 있는 사사로운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되려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모두를 지키기 위한 번거로움 속에서 안온한 미소를 머금는 일이 필요한 시점이다.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위해 집을 나설 때에 마스크를 귀에 걸치며 그런 마음들을 탑재하려 노력한다. 크게 감사할 일이 없어도 종종 그 존재를 깨닫고, 큰 웃음을 마주치진 못하더라도 나름의 유머를 찾으려는 일. 얼마간은 그런 하루의 시작을 위해 노력해왔지만, 생각보다 잘 되지는 않았다. 문득 생각하면 화가 치밀기도 하는 걸 어떡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도는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들을 다시 주목하게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금방이라도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진지하면서도 쓸모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일 같은 것. 우리가 각자가 열광하는 분야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해도, 서로의 주제에서 싹을 틔워가며 일궈내는 하나의 담화들. 그런 얘기들을 하면 왜인지 내가 그 주제와 관련한 전문직에 종사해서 그에 대한 지식을 쏟아내는 것만 같은 착각을 하기도 하는데, 아무렴 상관은 없다. 단지 그 시간 안에서 내가 좋아할 수 있다면 그게 전부다.

우리가 겨우 소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공복에 맥주 몇 잔을 들이켠 후에, 당장 서로가 즐겨 듣는 음악들에 대해 말하는 것. 얼마 전에 본 영화들이 어떤 원리와 손길들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감탄하고 끊임없이 열광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이유를 더욱 세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시간을 들여 탁상공론하는 것.

소소한 행복이라 여길 수 있지만, 그것들을 도리어 큰 기쁨이라고 받아들일 때 새로운 희망도 같이 움트는 것 같다. 그런 마음들은 때론 일부러 부풀려짐에도 허황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 자연스레 동화될 수 있다. 즐거움엔 끝이 없다는 어느 방송사의 슬로건처럼, 그렇게 사사로운 것들에 생긋대는 일이 어쩌면 불확실성의 미로를 탈출하는 데에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내일도 유머를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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