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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디 Jun 08. 2023

순례자가 가방을 배달시킨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변수도 이겨내야 한다는 것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4~6월에는 스페인의 건기로 비가 자주 오지 않는다. 비가 자주 오지 않으니 우비를 챙길 필요는 없지만 40일을 걷는 내내 비를 한 번도 맞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으니 여름 산티아고 순례길의 준비물에도 '우비'는 필수품으로 여겨지곤 했다. 나도 당연히 우비를 첫 번째로 챙겼다. 우비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을 포함해 70일의 여행기간 내내 가방 속에 잠들어 있었다.


나는 거의 매일 가방을 다음 마을까지 보내는 동키서비스를 이용했다. 처음 가방을 통째로 다음 마을로 보내면 몸은 가볍지만 마음은 조금 무겁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물건이 필요한 순간에 배낭이 없을 경우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동키서비스가 익숙해진 뒤엔 챙길 물건과 그렇지 않은 물건을 쉽게 구분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짐은 고정이었다. 핸드폰, 돈, 순례자여권, 물 그리고 입가심용 민트캔디 그리고 우비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다.


순례길 초반만 해도 혹시 모르는 상황을 위해 우비를 꼭 들고 다녔다. 하지만 건기인 스페인의 5월은 좀처럼 비가 잘 내리지 않았고 어느덧 우비는 계륵이 되어 있었다. 한 번쯤 비가 올 수도 있으니 버릴 수는 없지만 아마도 앞으로 1번 쓸까 말까 할 것 같은 아이템. 우비는 이제 구석에 박혀 배낭과 함께 다음 마을로 옮겨지곤 했다.


평소처럼 배낭을 다음 마을로 보낸 날이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날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어 원망스러웠던 하늘에 하나둘씩 구름이 모이더니 해가 사라졌다. 흐린 연푸른색 하늘을 한 번, 일기예보를 한 번 보면서 초조하게 다음 마을을 향해 걸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를 연결하는 긴 들 길에는 비를 피할 곳이 없었다. 만약 비가 내린다면 꼼짝없이 비를 맞고 길을 걸어야 했다. 초조한 마음을 담아 잰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우리의 조급함이 전염이 되었는지 함께 길을 걷고 있던 순례자들의 걸음도 빨라졌다.


매일이 그렇게 날씨가 맑더니 어떻게 우비 없는 날을 골라 하늘이 흐린지. 내가 우비를 가방에 두고 가자고 했으니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못한 채 속만 태웠다.


"언니, 근데 강수확률 60%래. 비 오려나?"


"글쎄. 확실한 건 두 개 중에 하나야. 비가 오거나 안 오거나. 근데 비 맞아도 계속 걸어야 돼."


"왜? 가방이 다음 마을에 있어서?"


그렇다. 비가 온다고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걸어야 했다. 나의 모든 짐이 있는 그곳이 곧 내 집이었으므로. 동생에겐 비 맞고 걷는 것쯤은 순례자라면 한 번쯤 겪어야 할 일처럼 말을 했지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분노를 연로 삼아 앞으로 내딛는 보폭을 더 키웠다.


내리막길 너머로 마을이 보였다. 같이 걷던 순례자들이 하나둘 우비를 꺼냈다. 빨갛고 노란 꽃이 순례길 위에 점점 피어올랐다. 고작 한두 방울이지만 내 머릿속에서 이 비의 끝은 태풍이었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최악의 상황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은 다음 마을에서 오늘치 순례를 끝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라는 아쉬움이었다. 장점만 있다고 생각한 동키서비스의 단점을 알아버렸다. 만약 내가 지금 배낭을 메고 걷고 있더라면 남은 거리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다음 마을에서 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나에겐 이미 가야 할 목적지가 있어 멈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었다. 배낭을 메고 있다면 내가 필요한 순간에 언제든지 멈출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게 엄청난 장점이라는 것 또한.


작은 빗방울들이 점점 크기를 키웠다. 곧 비가 크게 내릴 것 같았다. 느긋한 순례자들을 제치고 달리듯 걸어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눈에 보이는 바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차라리 얼른 비가 쏟아지기를 기도했다. 하늘이 가장 잘 보이는 테라스 자리에 앉아 계속해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민지~ 굿모닝!"


낯선 사람들에게 좀처럼 다가가지 않아 누군가를 사귈 기회가 없었던 우리 자매에게 먼저 다가와 인사도 해주고 얼굴을 볼 때마다 말도 걸어주었던 크리스였다. 이제 막 바에 도착했는지 테이블에 배낭과 스틱을 올려놓은 크리스는 언제나처럼 밝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해주었다.


"헬로! 굿모닝! 벗 웨더 이즈 낫 굿. 아이 띵크 레인 순 (번역 : 비가 올 것 같다는 뜻)"


크리스는 하늘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괜찮아. 비 안 올 거야.'라고 말하며 본인 핸드폰에 있는 일기 예보를 보여주었다.


"잇츠 오케. 노 레인, 온니 클라우드"


비가 오지 않을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크리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비는 입지 않은 채였다. 날씨 요정이 된 크리스는 짧은 인사를 끝으로 본인 일행이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나의 핸드폰은 여전히 강수확률 60%를 말했지만 이상하게 크리스가 비가 오지 않을 거라고 말하니 정말 비가 오지 않을 기분이었다. 크리스가 보여준 자료가 한국인인 내가 본 자료보다 더 정확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크리스는 미국인이지만 내 눈에는 준유럽인으로 느껴다. 뭐랄까, 서양인 라인...^^;;)


몇 방울 안 내리던 빗방울도 멈췄다. 아직 하늘이 흐렸지만 이상하게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먼저 떠난 가방을 찾으러 걸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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