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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Jun 24. 2024

뉴노멀의 시대, 모른다는 것을 알고 명상 속으로

사피엔스 시리즈를 갈무리하며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호모데우스>라는 다소 중복된 빅히스토리를 통해, 결국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1라운드 <사피엔스>에서 “인간의 삶에 의미가 있는 것 같지?” 라며 약 올리는 잽을 날린다. 신선한 공격 패턴이다. 2라운드 <호모데우스>에서 “이야기가 너무 멀리 갔나? 혼란스럽지?” 라며 연이은 잽으로 조롱한다. 패턴은 보이지만 피할 수 없다.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그로기 상태의 내가 클린치를 하자, “눈앞의 현실이 시궁창일지라도 좌절하지 말라고~ 뉴노멀일 뿐이야.”라고 속삭인다. 결국, 다리 힘이 풀려 녹다운되고 만다.


인류는 15만 년 전 화식과 도구의 사용으로 ‘호모 파베르’가 되고, 7만 년 전 언어를 사용하고 신을 만들어 탐욕적으로 세상을 삼키기 시작하여, 1만 년 전 농업혁명, 500년 전 과학혁명을 거치며 홀로 우뚝 선 ‘호모 데우스’가 되었다. 그러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후 이상하게도 딸꾹질이 멈추지 않는다. 왜일까.


과학의 폭주는 도덕성조차 진화의 산물로 치부하고 정보 네트워크와 인공지능을 위시하며 인류를 선택의 기로 앞에 세웠다. 선택받은 초인간이 될 것인가, 아니면 도태되어 데이터 가축이 될 것인가. 마치 스스로 무덤을 파고, 내가 들어가 누울지 남을 눕힐지-저자는 ‘종의 분화’라 표현- 고민하는 듯하다. 이쯤 되면 ‘호모 사피엔스’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이제 일자리는 사라지고, 조지 오웰의 <1984>가 현실이 된다. 데이터가 부의 기준이 되고, 인공지능에 밀린 무용계급은 궁지에 몰린다. 먹고살 만큼은 자비를 베풀지만, 공짜는 없다. ‘기본 소득’을 손에 쥐어주고 당신을 해킹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빅브라더(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핵전쟁, 생태 붕괴, 기술적 파괴의 세 가지 과제를 어떻게 타개할까. 파편화한 개인을 다시 묶어야만 한다.

그러나, 국경을 없애고 지구 공동체가 되는 길은 요원하다. 민족주의에 흠뻑 젖은 우리는 이민조차 배타적이지 않은가. 어쩌면 하나 되기 위해 잃어버린 신을 되찾아 와야 할지 모른다. 신이 아니라도 어떡하든 도덕성-고통을 줄이는 것-을 회복하고 연민, 인류애를 호소해야 한다. 물론, 휴먼 에러가 불시에 자멸시킬 가능성은 늘 공존하다.


“그래서?” 난 숨을 헐떡이며 가늘게 내뱉는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된 세계에서 최고의 도덕적 정언명령에 따르면 아는 것도 의무가 된다. 근대 역사에서 최대 범죄는 증오나 탐욕이 아니라 무지와 무관심에서 더 많이 나왔다’ p338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던 소크라테스를 소환하라. 무지의 앎에서 시작하여 자아를 재정의하고 의지를 갖고 관찰하라. 인생과 우주 속 모호한 서사를 찾아 헤매지 말고, 오히려 ‘고통’을 주시하라.

자, 명상은 어떤가?


시공간을 넘나들며 독자의 의식을 한층 고양시킨 탓에 한껏 부푼 기대감이 일순 터져버린다.

홧김에 후려치면,

“유일신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과학이 그렇다네요. 한동안 우리가 신 행세를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명상해야 해요” 아닌가.


당연히 공감하는 뉴노멀의 시대다.

당연히 모든 것을 다시 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당연히’라는 사후적 고찰로 저자의 위대한 담론을 감히 폄하할 수는 없다. 다만, 너무나 거대한 담론을 몇 문장으로 집약하다 보니 터무니없이 밀도가 낮아진 것 아닐까.


빌 게이츠도 저자를 따라서 명상을 하고 있다고 하니 나 역시 책을 덮고 눈을 감는다.

‘난 무엇을 기대했나?’

난 여전히 내가 모른다는 것만 안다.

이제, 한 구절만 새겨두고 책장에 꽂는다.

‘50세가 되면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중략) 소극적이다. (중략) 앞으로 수십 년을 멍청한 화석 상태로 보내야 할 수 있다. 세상에 뒤처지지 않고 살아가려면 끊임없이 배우고 자신을 계속 쇄신하는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50세 정도의 젊은 나이라면 확실히 그래야만 한다’ p397


‘50’에 내 나이를 넣어 다시 읽는다.

적어도 멍청한 화석이 되어 발길질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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