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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Mar 04. 2021

시작은 미비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카미유 피사로; 마이 홈 마이 웨이-

시골 출신의 늦깎이 풍경화가

 1874년 4월 15일~5월 15일. 카퓌신 거리 35번지에 있는 사진작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에 모네, 세잔, 드가, 기요맹, 모리조, 르누아르, 시슬레, 피사로가 모였다. 이들은 ‘화가, 조각가, 판화가의 협동조합’이라는 명칭을 내걸고 이곳에서 독립 전시회를 열었다. 그 유명한 인상파전의 시작이다.

 심사위원도 없고 출품 작품의 선정 기준도 없는 전시였다. 이들은 20년 전 쿠르베가 그리고 10년 전 마네가 그리하였듯 관전(살롱)의 인습으로부터 탈피하여 자신의 개성과 독창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을 자유롭게 선보였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수익이 나면 모두가 골고루 나누어 갖자고 합의하며 지극한 동료애를 나누었다.

카미유 피사로, <하얀 서리>, 1873

 그러나 세간의 인정을 받고 경제적인 독립까지 꽤 하려 했던 이들의 꿈은 금방 물거품이 됐다.

 당시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뱅상은 피사로의 그림〈하얀 서리>를 보고 피사로의 안경에 때가 묻지 않고서야 이렇게 지저분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느냐며 빈정거렸다. 설상가상으로 4월 25일,《르 샤리바리》지의 기자 루이 르루아는 뱅상이 이처럼 경악하는 모습을 그대로 실으면서 인상파의 기법이 얼마나 어리숙한지를 피력했다.: "도대체 저게 뭐지? 지저분한 캔버스 위에 팔레트 부스러기를 뿌려놓은 것처럼 보이는군, 하지만 저기에는 인상이 있어."1

 또한 모네의 <인상, 해돋이>의 그림을 이 전시회의 대표작으로 꼽아 "그 인상만큼은 확실하지만 유치한 벽지보다 못하다"라며 혹평했다. 이를 계기로 모네와 함께 전시에 참여했던 화가들 모두 인상주의 화가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대중들에게 가장 호응을 받는 미술 사조 인상주의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불명예 스러웠다.


 조롱을 산 피사로는 “비평가들이 우리를 조각조각 찢고 있습니다”라며 격분했다. 동료 화가 기요맹이 “왜 당신은 당신 자신을 항상 의심합니까? 그것이 바로 당신이 극복해야 할 병입니다.”라며 피사로를 위로했지만 피사로의 불안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당시 피사로는 마흔넷으로 동료들보다 평균 나이가 열 살쯤 많은 시골 출신의 화가였다. 포르투갈계 유대인인 그는 카리브해(세인트 토머스 섬)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덴마크의 풍속 풍경화가 프리츠 멜비 밑에서 수학했다. 스물다섯 살이 된 무렵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위해 파리로 왔으나 오랜 시간 무명의 설움을 겪고 있었다. 타지인에다 나이도 많은 탓에 동료들 가운데서도 그가 가장 초조했을 것이다. 인상파의 첫 전시부터 8회 때까지 빠짐없이 참가한 화가는 피사로가 유일할 정도로 그는 부단히 노력했으나 성과는 미비했다. 열심히 그려도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친구 피에트에게 신세를 지며 사는 형국이었다.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의 공장>, 1873

 피사로는 성품이 온화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때때로 자신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내기도 하였다.

 당시 파리의 젊고 혈기 넘치는 예술가들은 목요일마다 카페 게르부아에서 열린 ‘바티뇰파’ 모임에 참석하였다. 피사로를 비롯한 화가 마네, 드가, 바지유, 모네, 르누아르, 세잔과 작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졸라, 뒤레, 뒤랑티가 모여서 예술적 인습 타파와 살롱의 편파적 심사, 일본 판화, 밝은 색채의 표현기법에 대해 논했다. 피사로는 이들 중 누구보다도 전통과 관습에 대한 저항심이 깊었던 것 같다. 그는 루브르를 태워 없애버려야 한다”라고 까지 말하며 전통과 아카데미 예술의 권위에 거친 반감을 표했다.

 피사로의 이러한 성향은 그의 출신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일찍이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던 그의 고향 세인트 토머스 섬은 인종차별과 노예해방 문제에 대해 과격한 태도를 취하는 급진주의의 온상이었다. 게다가 피사로의 부모는 유대 율법을 어긴 결혼으로(그들은 이모와 조카 사이였다) 세인트 토머스 섬의 유대 교회와 갈등을 빚었다.2  이런 영향 때문인지 그의 초기 작품(1970년대)에는 아카데미가 반기지 않는 흑인과 노동자들이 주로 등장한다.

 이와 같이 보건대 피사로가 프루동(무정부주의자이자 사실주의 화가)의 주장에 매료되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 피사로는 프로동과 그 추종자들이 기고한 당시의 주요한 급진적 신문《라 랑테른(등불) 을 정기 구독하며 부르주아의 패권주의를 고발하는 이들의 사상과 행보를 지지했다.




도전과 뚝심

 파리 생활을 잠시 접고 1884년, 피사로는 지소르 바로 북쪽에 있는 에라니읍으로 이주했다. 이곳은 파리에서 기차로 두어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퐁투아즈보다 거리상 두 배나 멀리 떨어진 농촌마을이다.  

카미유 피사로, <나뭇가지를 쥐고 있는 시골 소녀>, 1881

 피사로는 이곳의 시골 전경을 회화의 무대로 삼았다. 파리의 인상주의 회화가 주제로 삼는 도시의 풍경과 부르주아의 여가 풍조를 시골풍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림 <나뭇가지를 쥐고 있는 시골 소녀>가 그것의 첫 시도이다. 푸른색의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빨간색과 흰색 체크무늬의 두건을 쓴 소녀가 풀밭에 앉아 한가로이 햇볕을 쬐고 있다.

 드가와 르누아르가 화제로 삼은 아름답고 도시적인 부르주아지의 여성은 피사로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예쁜 나들이 옷을 입고 무도회장을 가고 연극을 보러 가는 아가씨들과 화려한 조명 아래서 춤을 추는 무용수들이 시골 촌부에게 밀려났다. 밭메기를 하는 여인들,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는 여인들, 완두콩 받침대를 세우는 여인들, 화전을 일구는 여인들이야 말로 피사로의 뮤즈였다.

 피사로는 화제로 삼는 인물들 뿐만 아니라 화법면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1880년대의 그의 작품은 조르주 쇠라화풍인 분할주의를 적극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르주 쇠라,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1884

 신인상주의자 쇠라는 색채의 진동에서 최대의 광도를 포착한 일명 ‘과학적 인상주의’ 기법을 선보였다.

 학구파였던 쇠라는 미술이론 서적을 읽으며 새로운 화법을 시도하였다. 특히 화학자 미셸 외젠 슈브뢸이 쓴 <색채 대비의 법칙>이라는 이론서를 통해 물감은 빛과 달리 서로 섞이면 검은색을 띠고, 또 보색과 나란히 있을 때 그 반사작용으로 인해 색의 선명도가 커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3  이에 쇠라는 팔레트에 물감을 섞어 바르는 방식이 아니라 화면에 보색의 물감을 나란히 병치하는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 분할주의 기법이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점묘법(모자이크 화법)이다.

 이는 상당히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토대에서 발현된 것으로 인상주의를 좀 더 객관적인 토대 위에 세울 수 있는 대안이었다. 

카미유 피사로, <콩 받침대를 세우는 농촌 아낙네들>, 1891

 그러나 선배 화가들과 화랑 주인들은 이 새로운 회화 양식을 주목하지 않았다. 오로지 피사로만이 큰 흥미를 느끼며 자신의 회화에 적용시켰다. 젊고 진보적인 후배 화가들의 그림을 가볍게 보지 않고 거기서 새로운 비전을 본 것이다. 그의 나이 55세에 꾀한 큰 도전이었다.  

 여기에는 미술도 과학처럼 객관적(정확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공정하다는 뜻도 포함하여)이고 민주적(누구나 시각적 묘사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일 수 있다는 피사로의 신념이 서려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4

 그러나 피사로의 급격한 화풍 변화는 이해받지 못했다. 평소 그의 그림에 호의적이었던 뒤랑 뤼엘 역시 그의 점묘법 작품에 우려를 표했다. 피사로의 생계는 극도의 위협을 받았다. 당시 동료 화가인 르누아르와 모네는 차츰 세간의 인정을 받으며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있던 터였다. 수익이 생기면 함께 나누자며 동료애를 다졌던 화가들은 서서히 독립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인상파전도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카미유 피사로, <오후의 몽마르트 거리>, 1897

 제 아무리 인습에 도전하고 새로운 화풍도 거침없이 소화하는 피사로였지만 사회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동료에게서 마저도 동떨어 지고 있다는 기분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였을까. 피사로는 파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피사로는 파리의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몽마르트 대로 주변의 아파트를 얻어 아침 밤낮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창가에 서서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빛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관찰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동세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 세부적인 묘사는 생략하고 몇 번의 간략한 붓질만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정확한 형태는 피사로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시시각각 변하는 도시의 인상을 놓치지 않고 그리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오후의 몽마르트 대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는 곧장 군중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승합 마차들이 빠른 속도로 대로 위를 달리고 있다. 마차에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과 길을 건너려는 사람들도 점점이 보인다. 마차와 사람들은 몇 번의 붓질로 대략적인 실루엣만 표현됐는데, 이러한 표현법은 분주하고 활기찬 도시의 '인상'을 생생하게 살린다.

 

 그런데 이 몽마르트 거리가 어떤 곳인가. 프랑스 근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의 하나인 1871년의 파리 코뮌 진압이 일어난 곳이 아니던가. 티에르의 공화파와 코뮌 가담자들이 벌인 일주인간의 전면전과 그 이후에 이어진 처형으로 3만 명이 목숨을 앗아갔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추방된 역사가 서린 곳 아닌가.

 하지만 그 흔적은 인상주의 회화에서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도시인의 눈으로 휴일을 즐기는 도시인들의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상을 화폭에 담고 있었다. 한때 코뮌에 점령되었던 도시 공간을 되찾은 부르주아지의 정신적 회복의 형상화였다.

 이와 같은 사실, 코뮌의 충격과 상처가 바쁘고 활기찬 파리 부르주아의 생활상으로 지워졌단 사실은 피사로에게 어떠한 현기증을 일으켰던 같다. 스스로를 '빈털터리 부르주아'라고 부르며 평생 동안 부르주아지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한 그가 파리에서 유토피아를 찾을 리는 만무했다. 그는 다시 시골로 돌아갔다.




마이 홈, 마이 웨이

 말년의 작품 활동은 에라니, 루앙, 디에프에서 이루어졌다.

 <에라니의 일몰>, <루앙 항구>는 리얼리즘에 대한 강렬한 연구에서 비롯된 빛의 연구와 후배 화가 쇠라에게서 얻은 과학적 색이론의 기법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특히 피사로의 유토피아이자 안식처인 농촌을 배경으로 하여 그 매력이 배가 된다. 더 작은 붓칠과 색채의 병치는 분명 쇠라가 먼저 시도한 것이지만 피사로는 이 기법을 사용하여 화면에 따뜻하고 몽환적인 행복감을 불어넣었다.

카미유 피사로, <에라니의 일몰>, 1890

 피사로는 70세를 넘기면서 부터 안질로 고생하였고 동료화가 모네의 명성에 눌려 때때로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루앙 대성당>을 그리고 나서 모네가 같은 소재와 작품명으로 그림을 출품한 것을 알자 피사로는 자신의 그림을 숨기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를 독려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의 예술 열정은 세간의 평가 따위로 쉬이 사그라 들 수 없는 것이었다.

 화가로 사는 동안 동료들만큼 크게 성공하지도 못했고 선도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탁월한 안목과 진취성은 다음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세잔과 고갱과 고흐가 피사로를 멘토로 여기고 잘 따랐다. 

 특히 자신만의 미학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던 세잔은 피사로를 아버지로 여기며 그의 사사를 받았다. 피사로의 아들 뤼시앙이 회고록에서 밝히기로 “세잔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매일 3km의 먼 거리를 걸어 다녔다”라고 한다.5 세잔은 자신이 교우하고 있던 다른 화가들보다 피사로의 작품이 더 진보한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의 그림은 시류를 따르지 않는 것이어서, 시대를 앞선 것이어서 비평가들의 비웃음을 사고 대중의 몰이해를 낳았지만, 새로운 미술 운동을 일으키려는 모든 혁신자들에게는 가히 선구적인 것이었다.

카미유 피사로, <루앙 항구의 일몰>, 1898

 카미유 피사로.

 시골 출신의 늦깎이, 어중간한 풍경화가, 빈털터리, 이 외로운 아웃사이더가 일평생 투쟁하여 쟁취하고자 한 것은 나의 길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길은 그의 영혼이 안식을 삼는 곳에서 완성되었다.

 뜨겁고 순수했던 그의 예술혼은 후대 화가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열어주며 영원히 남았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였다.






1) 제임스 H. 루빈, 김석희 옮김,『인상주의』, 한길아트, 2001, 9쪽.

2) 정금희, 『피사로』, 재원, 2005.

3) 제임스 H. 루빈, 김석희 옮김, 위의 글, 309쪽.

4) 위의 글, 282쪽.

5) 정금희, 위의 글.



[참고도서]

소피 포르니-다게르, 김혜신 옮김,『MONET』, 열화당, 1994.

정금희, 『피사로』, 재원, 2005.

제임스 H. 루빈, 김석희 옮김,『인상주의』, 한길아트, 2001.

아르놀트 하우저, 백낙청, 염무웅 옮김,문학과 예술의 사회사(4):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 창작과 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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