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잠잠하던 머리가 다시 두방망이질이다. 나는 안 맞는 라디오 주파수처럼 내내 지지직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어디 남겨 둔 두통약이 몇 알 있을 텐데, 하고 부엌 서랍장을 뒤적이다가 그만뒀다. 대신 곧장 베란다로 향했다. 언젠가 눈이 피로하거나 두통이 있을 때 녹색이라든가 하늘색이라든가 흙색이라든가 하는 자연의 색을 보면 도움이 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베란다에 엉덩이를 퍼덕 묻고 앉아 창 밖을 내다봤다. 그러나 자연이라 부를 만한 게 고작 침엽수 몇 그루가 전부다. 문득 내게 호미질을 할 자그마한 텃밭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비적후비적 넋 놓고 김매기를 하다 보면 제아무리 집요하게 따라붙는 두통이라 해도 호미질에 솎아진 잡초처럼 별수 없이 나가떨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어쩌면 나를 괴롭히는 이 두통이란 게 도시의 산물 일지도 몰라... 어떠한 균열도 허용치 않는 도시가 내 머릿속에 대신 균열을 내고 있는 게 아닐까? 철근 콘크리트 벽으로도 막지 못하는 소음, 헬스장의 러닝머신 위를 뛰며 흘린 땀방울로는 해소되지 않는 긴장, 투명한 유리창이 무색한 단절... 뭐하나 심고 자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시멘트와 아스팔트에 길들여진 내 몸뚱어리가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시위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자연으로
카미유 코로, <첫 잎, 낭트 주변>, 1855
비록 삶의 터전은 도시에 두었으나 마음속으로 늘 자연을 희구하기로는 바르비종파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르비종파란 19세기 초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 숲과 바르비종 마을에서 그림을 그린 화가들에 대한 통칭으로, 하나의 결속된 예술운동
-흔히 'ism'이라고 부르는- 이나 예술가 집단에 대한 지칭은 아니다. 이들은 대도시 파리를 주 거주지로 두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위해 주기적으로 바르비종을 방문하거나 그곳에 한동안 머물면서(완전히 정착한 화가는 밀레와 루소가 있다) 휴식을 취하고 작품 활동을 했다.
이들이 바르비종으로 모이게 된 이유는 정신없이 급변하는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따른 피로감 때문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부르봉 왕정복고기, 7월 혁명기, 2월 혁명기, 제2 공화국, 제 2제정기라는 빈번한 정치형태의 교차를 거치며 권력과 부가 이동되고 계층 변동이 심했다. 특히 파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갈등이 컸다. 이러한 혼돈의 시기에 심신이 지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 파리인들 사이에 권력의 아성인 도시를 벗어나 전원에서 자유롭고 평안한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마음이 팽배해졌다.1
여기에 '자연의 사용자에서 피조물로 돌아가고자' 하는 세계관의 변화도 한몫 거들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외침은 진보의 이념에 가리운 인간의 원초적인 자연을 동경케 하고, 2 문명이 아닌 야생의 자연에서 인간 정신을 발견하게끔 이끌었다(루소는 낭만주의와 자연주의 풍경화 양자에 영향을 주었다).
테오도르 루소, <풍경>, 1842
바르비종파는 이러한 인간의 자연에 대한 태도가 직접적으로 반영된 회화로 밀레와 코로, 뒤프레, 그리고 철학자 루소와 이름이 같은 테오도르 루소가 대표적인 화가이다.
이들의 회화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를 보라'는 자연주의의 특성을 갖는다. 즉 왜곡 없이 눈에 비치는 그대로 관찰하고 연구해서 정확하게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다. 예컨대 자연을 인위적으로 가감하여 그린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과는 확연히 다르다. 화가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암굴의 성모> 속 풍경은 단지 인물을 보좌하기 위한 배경으로만 기능하고 그 모습 또한 허구가 아니던가.
바르비종파 회화는 풍경화라는 단독 장르로서 어떠한 상징성이라든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배제한다. 역사적 교훈이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신고전주의 화가 다비드의 역사 풍경화라든가 낭만주의 시대의 독일 화가 프리드리히의 풍경화에서 보이는 종교적 감수성 역시 거부한다.
존 컨스터블, <건초 마차>, 1821
이쯤에서 그림에 대해 일가견이 좀 있는 감상자라면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한 전원 풍경화로서는 바르비종파의 풍경화나 영국의 풍경화나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동시대 작품으로 영국의 대표적인 풍경화가 콘스터블의 <건초 마차> 또한 한적한 시골 마을 풍광을 사실적이고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붉은 박공지붕 집 주변으로 싱그러운 녹음이 우거지고 멀리 연둣빛 초원이 펼쳐져 있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총총히 떠다니고 강물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한 농부가 물속에서 건초 마차를 끌고 있고 그런 사내를 개 한 마리가 지켜본다. 참으로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이 그림은 시골에서 성장한 콘스터블이 살면서 내내 봐 오던 주변 풍경을 그린 것이다. 곧 바르비종 화가들처럼 의도적으로 자연풍경을 찾아서 그린 게 아니란 것이다. 대부분 도시 출신인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자연에 대한 향수로 파리를 떠나 바르비종 마을과 퐁텐블로 숲으로 모여들었고 그곳에서 창작활동을 하며 안식했다. 이들의 그림은 정신의 휴식처인 자연을 찾아 나선 결과인 것이다.
사실엄격히 따진다면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자연에 대한 태도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무한하고 위대한 자연이라는'숭고'의 개념,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사고, 그리고 '이상향'으로서의 자연 개념 등 여전히 낭만주의적 감성을 풍기기도 한다. 예컨대밀레의 그림 <만종>은 저녁시간이란 시간과 기도라는 종교성이 감상자로 하여금 명상주의적 감상에 젖게 한다.
그럼에도 "바르비종파는 자연에 충실한 최초의 프랑스 풍경화"3 임에는 분명하다.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자연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자연을 정확하게 알고자 하는 과학적인 태도로 빛의 강약과 대기의 변화, 대상의 형과 색을 충실하게 묘사했다. 이러한 연유로 그림은 사실성과 현장감이 돋보인다.
눈 앞에 펼쳐진 자연의 모습을 자신의 화폭에 그대로 담고자 애쓴 테오도르 루소는 어느 날 자신의 작업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자연의 신선한 인상을 기억 속에 잘 챙겨두기."4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바르비종파 회화는 훗날 인상주의회화를 탄생케 하는 씨앗이 되었다.
회복의 길
테오로드 루소, <출입구>, 1855
번잡한 도시 생활에 지쳐 자꾸만 자연으로 기우는 마음.
그러나 엄연히 따지고 보면 자연이란 게 마냥 인간에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해마다 폭우로, 가뭄으로, 때때로 자연은 우리의 삶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집어삼키는가. 그것이 한 번씩 몸을 뒤틀고 용트림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목숨이 속절없이 스러져갔던가.
그럼에도 여전히 자연의 품에 쏙 안기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낮이고 밤이고 쉴 새 없이 달리는 배달 오토바이의 모터 소리보다는 어두운 밤, 깊고 으슥한 숲 속에서 불어오는 동굴의 음침한 울음소리를 듣는 게 좋겠다 싶은 건, 내가 자연의 민낯을 너무 몰라서 하는 소릴까?
자연으로 돌아가라, 는 루소의 구호는 온전히 실현되지 못해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여전히 사회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 혹 루소의 말대로 문명을 떠나 자연에 귀의한다면 훼손된 인간의 본성 그리고 지친 우리의 마음은 회복될 수 있을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순수한 파라다이스, 영육의 휴식처... 오늘도 녹색을 찾는 내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