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 <발코니>, 1950
고통과 절망의 시간 속에 사로잡혀 있을 때면 차라리 돌이나 흙이나 나무토막처럼 아무런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사물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강요나 중압감에 시달리지 않고 그저 내 안에서 고요히 머물고 싶다는 바람. 이러한 유혹이 가슴속에 일렁일 때면 사물의 근원적 특성을 생각하게 된다. 자기 의식은 갖되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양태.
“애초에 왜 너는 태어났는가? 네가 그것을 원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플로베르).
인생을 마지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든 감각으로부터 무감각하게 되기를 바란다. 어떤 행동도, 어떤 직업도, 어떤 사회적 신분도 갖지 않고, 어떤 인간적 유형으로도 분류되지 않겠다는 결정의 거부로 이어진다.1
이 완전한 정적주의와 수동성에 대한 갈망은 카프카의 소설『변신』에 잘 드러나 있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힘들게 돈을 벌며 가족을 부양하던 주인공이 자신의 삶에 대한 강박과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흉측한 벌레로 변신하는 소설의 내용은 가정의 치욕 거리이자 저 스스로도 수치스러움을 피할 길 없는 무기력한 자아가 인간이길 포기하고 하찮은 미물이 되어서야 비로소 모든 책임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이러한 충동을 엿본다.
마그리트, <레카미에 부인>, 1951 그림 <레카미에 부인>과 <발코니> 속 인물은 모두 사물화되었다. 육체의 부피, 보드라운 피부, 펼쳐진 치마 옷자락, 수줍고 당돌한 시선 모두 딱딱한 나무 관으로 처리됐다. 꽃, 비둘기, 사과 따위로 인물의 표정과 시선을 숨기는 데페이즈망(Depaysment)* 화법이 보다 파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 뒤바뀌고 안과 밖의 구분이 없으며 밤과 낮이 공존하는 등 물리적인 모순을 꾀하고 논리적인 환치를 이루며 자유롭고 변칙적인 마그리트의 그림에 익숙한 감상자라할지라도 이 두 그림 앞에서 받는 당혹감은 실로 클 것이다.
그는 왜 이렇게 그렸을까? 마그리트는 왜 인물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사물로 가리고, 천으로 뒤집어씌우고, 종국엔 나무 널빤지로 만들어버린 걸까? 그것은 인생의 필수적 변증법인 존재와 무를 암시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울한 인간은 세상이 사물화 되는 것을 본다. 사물에 생명이 없으면 없을수록 그것을 숙고하는 정신은 더욱 강력하고 영민해진다”는 수전 손택의 말따나 지독히 우울했던 것일까? 하기야 하얀 네글리제 소재의 잠옷을 얼굴에 휘감은 채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어머니 때문에 평생 정신적 외상에 시달려야 했던 그의 일생사를 들춰보건대 그에게 드리워진 우울의 그림자를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그림 속 사라진 육체와 그 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텅 빈 나무 관은 죽음을 희구하면서도 막상 자살을 결단할 용기는 없는 그가 선택한 죽음의 장치인 것인가? 그러니까 어머니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 그리고 죽음에 대한 강박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전략, 곧 사물이 되겠다는 욕망으로.
* 어떤 물체를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데페이즈망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은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인 시인 로트레아몽의 유명한 시구절 ‘재봉틀과 박쥐 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듯이 아름다운’에서 잘 나타난다. 즉 낯익은 물체라도 그것이 놓여 있는 본래의 일상적인 질서에서 떼내어져 이처럼 뜻하지 않는 장소에 놓이면 보는 사람에게 심리적인 충격을 주게 된다.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초현실주의자들은 경이와 신비에 가득찬,꿈속에서만 볼 수 있는 화면을 구성했는데, 초현실주의에 의하면 이런 그림이 보는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잠재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월간미술).
1)박정자,『잉여의 미학』, 기파랑:에크리, 2014, 143쪽.
[참고문헌]
박정자,『잉여의 미학』, 기파랑:에크리, 2014.
수전 손택, 홍한별 옮김,『우울한 열정』, 이후,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