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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Mar 01. 2021

경이로운 헛질

-현대미술가 쑹둥의 행위 예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의 의미-

 며칠도 못 넘기고 사장돼버릴 수 있단 걸 뻔히 알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위험하고 불확실한 것을 관철시키려고 모든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지만 결과물에 대해선 어떠한 낙관도 가질 수 없는 일이 있다. 이를테면 거절당할 게 뻔한데도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기어이 마음을 고백하는 일과 모두가 말리는 비즈니스를 오로지 자기 확신과 자기 경영철학만을 의지해서 밀고 나가는 일. 

 내게 있어서는 글쓰기가 그렇다. 

 글쓰기가 좋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좋기만 하면 취미이게. 즐거울 때만 심장을 뛰게 할 순 없듯이 존재하기에, 또 존재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물론 전망을 생각하자면 나라고 깝깝하지 않겠는가. 내가 하는 일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란 질문은 남보다 내가 나 자신에게 더 많이 한다. 

 나는 뭐하자고 이 미련을 떠는가?

 그런데 이 미련한 짓거리를 예술의 주제로 삼은 이가 있다.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해보려 한다. 중국 현대 행위미술가 쑹둥(宋冬)의 이야기이다. 

 

쑹둥, <호흡>, 1996 color photograph of his performance


  1996년 섣달 그믐날유난히도 추운 베이징의 겨울밤이었다한 예술가가 천안문(톈안먼天安門광장에 엎드려 찬 시멘트 바닥에 얼굴을 대고 연신 축축하고 뜨거운 입김을 불어댔다. 그는 영하의 기온 속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입김을 불었다. 그렇게 40분이 흘렀다이윽고 바닥에 얇은 살얼음이 끼었다그러자 그는 아무 말도 없이 홀연히 그 자리를 떴다현대 중국 미술을 대표하는 행위 미술가 쑹둥의 <호흡>이다.

 쑹둥이 살얼음을 만든 곳, 천안문 광장은 1919년 5·4 운동 시기부터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중국 시민들의 저항적·혁명적 시대정신이 깃든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장소이다

 1989년 6월 4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 및 시민들이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모여 평화시위를 하고 있었다일반 시민들과 대학생들과 교수들, 심지어 의식 있는 경찰들까지 자발적으로 모여 합심으로 일으킨 이 민주화 운동은 너무도 쉽사리 공권력에 짓밟혔다. 중국 정부는 이를 폭도들의 반란으로 규정하고는 전차와 장갑차를 동원하고 인민 해방군이 시민들에게 총포를 난사하는 등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한국의 광주사태와 비견할 수 있는 이 참담한 사건을 두고 반중 인사들은 "중국의 피의 일요일 혹은 베이징 대학살(Beijing Massacre)이라고 불렀다보다 중립적인 학자들은 천안문 민주화 운동 또는 1989년 톈안먼 광장 저항(Tiananmen Square Protest of 1989)이라고 명명했다.”(나무 위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힘으로 따지자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 아닌가.  쑹둥의 예술행위도 마찬가지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추위에 떨며 호호 입김을 불어 겨우 만든 살얼음은 오래지 않아 녹아 사라지고 말 헛수고가 아닌가. 


쑹둥, <물로 쓴 일기> , 1995

 쑹둥의 다른 작품 <물로 쓴 일기> 또한 ‘남는’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이다. <물로 쓴 일기>는 물 위에 도장을 찍고, 붓에 물을 적셔 석판 위에다가 일기를 써 내려가는 행위미술이다. 고체가 아닌 액체 위에 도장이 찍힐 리 만무하며 먹이 아닌 물로 쓴 글씨이니 마르고 나면 애써 쓴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게 자명하다. 

 그는 왜 이런 소용없는 짓을 한 걸까?

 미술사학자 우정아는 그가 물리적인 유형화를 거부하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은 체 그 행위를 지속해왔던 자신의 몸의 느낌과 심리적인 경험만을 기억할 뿐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무엇을 자신의 몸에 정신에 아로새겼을까?

 아무리 보잘것없는 힘일지라도 그것이 사회에 어떠한 작은 변화를 불러오기도 하고 설사 그 변화의 정도가 아주 미비할 지라도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비록 하루도 못 넘기고 사장되어 버린 나약하고 불완전한 것이지만, 때문에 누군가에는 하등 쓸모없는 미련한 짓이지만, 그의 의지와 노력과 정신이 관철되었던 순간은 분명 존재했다. 수고의 흔적은 오래지 않아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의 행위는 그의 기억 속에, 또 감상자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어떤 숭고한 것을 남겼으리라. 실패한 천안문 사태가 '좌절된 중국의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기호로 역사에 두고두고 남은 것처럼.

 그러므로 누군가에는 결코 허망한 일이 아닐 게다. 내 수고가 무엇을 남길 것이냐를 생각하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보여준 일에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또 혹시 아는가,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다면 정말로 태산을 옮길 수도 있을지.





[참고문헌]

우정아,《남겨진 자들을 위한 미술》, 휴머니스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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