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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Jan 28. 2021

아는 척 하려는 자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피터 브뤼겔의 그림과 키치Kitsch에 관하여-

피터 브뤼겔, <장님을 이끄는 장님>, 1568

 멀리 교회를 배경으로 여섯 명의 맹인이 등장한다. 앞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거나 지팡이를 잡고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을 향해 걷는다. 이들이 알든 모르든 이들은 운명공동체다. 맨 앞에 선 자가 먼저 구렁에 나자빠졌고 앞사람에게 의지한 완전한 수동형의 자세를 보이는 나머지 사람들도 차례차례 구렁에 빠질 참이다.

 이 그림은 16세기 플랑드르(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일대) 화가 피터 브뤼겔의 작품으로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구덩이에 빠진다"는 성서(마태복음 15장 14절)의 내용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여기서 ‘장님’은 시각장애인을 뜻하는 게 아니라 진리와 분별에 어두운 어리석은 자를 말한다. 욕망에 눈이 가려 눈 뜬 장님이 되거나, 나태한 탓에 주체적인 사고 하기를 그칠 때, 그것이 불러올 폐단은 필연적이다.    

 브뤼겔이 활동하던 시기는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매우 혼란했다. 대외적으로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 의한 신대륙 발견과 오스만 터키의 위협으로 인해 고대사회의 중심지였던 지중해가 폐쇄되면서 대서양에 인접한 여러 유럽 국가들이 주요 국가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무역의 중심은 지중해에서 서유럽으로 넘어왔다. 종교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대립이 첨예했다. 이 틈바구니 속에 플랑드르는 근대를 맞이했다. 근대의 막이 오르자 지방 봉건제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군주 봉건 세력의 압박과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진 개인은 너도 나도 없이 안트베르펜, 브뤼셀, 암스테르담 등의 대도시로 이주했고 수공업, 상업, 금융, 미디어 산업을 부흥시키며 개인 재산을 축적했다.1 

 그러나 인구증가와 함께 사회 구조는 양극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급속한 도시 성장 속에서 매우 적은 수의 엘리트와 상인, 기업가들만이 부를 축척했고 엄청난 숫자의 가난한 난민들이 사회를 구성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부동산을 소유한 가구는 24퍼센트의 중산층 계급이었고, 그중 12퍼센트만이 세금을 충분히 부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총인구의 70퍼센트를 이루는 계급은 집을 소유할 수 없는 하층계급이었다. 이들은 최저 생활수준으로 먹고살기에 바빴고, 하급직공이나 납품팔이꾼· 노동자· 농민· 무직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심각한 양극화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열기와 도시계획이 계속 진행됐다. 당시 행정장관은 1542년에서 1545년 대규모의 도시계획 캠페인을 벌였는데, 이는 25헥타르에 이르는 도시 성곽 주변의 땅들로 주거지를 늘리는 것이었다. 이에 부자들은 더 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게 됐으나 하층계급을 위한 주거지는 여전히 부족했다.2

 브뤼겔의 그림은 이러한 시기에 나라나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반문한다. 

 마치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형국과도 같은 플랑드르의 상황을 화가는 멸망 직전의 바빌론이나 로마와 다름없다고 보았던 것일까? 그의 또 다른 그림 <바벨탑>에는 현 사태를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피터 브뤼겔, <바벨탑>, 1563

 끝없이 높은 욕망의 탑을 쌓아 올리며 신의 영역에 도전한 바빌론인과 로마인들의 바벨탑 쌓기. 이 유명한 성경 우화는 당시 합리성과 균형감각을 상실한 폴랑드르의 상황과 비견된다.

 탑이 기우뚱한 것은 탑을 쌓는 이들 간에 상호 소통이 올바로 이뤄지지 않아 공사의 선후관계가 뒤바뀐 탓이다. 밑에서부터 차근히 모든 층과 균형을 맞추며 올려야 튼튼한 탑을 쌓을 수 있건만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공사를 서두르기만 한 것이다.

 불통과 불합리성, 우매함과 맹목적 추종의 벽돌을 얹을수록 탑은 균형을 잃고 위태로워지는 법. 언제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였다.

서양 미술사학계에서 브뤼겔은 농민의 생활상을 자세하게 묘사한 그림으로 인해 오랫동안 농민화가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사실 그가 농민 출신의 하층계급이 아닌 오히려 교육받은 교양인(아놀드 하우저는 브뤼겔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도시 화가였으며 그의 후원인이자 가까운 친구들 또한 모두 지식인 계층에 속한다고 강조한다) 이라는 학자들의 견해가 속속 등장함에 따라 브뤼겔의 그림을 단지 노동자들의 일상적이고도 친밀한 생활상을 담을 것으로 읽지 않고, 화가의 비판적 시각이 담긴 은유와 텍스트로 보기 시작했다. 일례로 로즈 마리 하겐은 브뤼겔의 그림을 사회적 혼란기에서 점점 가난해지는 하층민들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하였다.
(전수정,「피터 브뤼겔의 농민화 연구 -도시민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청구논문, 2012에서 참고.)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고, 무너지는 줄 모르고 드높은 바벨탑을 쌓기에 여념 없는 이 기막힌 상황. 작금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부조리한 리더는 우리 삶 도처에 있다. 자신의 뜻과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예수와 부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며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종교 지도자, 갈증 난 민중들에게 샘물을 약속하며 바닷물을 먹이고 언발에 오줌누기식의 정책만 남발하는 정치가, 남에겐 가차 없고 자신에겐 한 없이 관대한 내로남불 언행불일치의 교육자, 권력에 복무하고 시장의 입맛에 편승한 지식인, 연기와 코스프레로 위장한 예술가... 그리고 이 거짓 선동가에게 돈과 시간과 열정을 갖다 바치며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들. 무려 오백 전 북유럽 땅에서 제작된 브뤼겔의 그림이 현재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그대로 꼬집고 있지 않은가?

 

 특히 문화-정신계의 위선과 저속함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다. 차라리 문화와 예술과 종교가 배를 불리고 섹스를 하는 일처럼 종의 지속을 위해 봉사한다면, 혹은 일이 좀 더 즐겁게 자극을 주는 도구로서 취급되었더라면 오히려 낫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것들이 표방하는 것은 가장되고 교활하기 그지없다.

 내려놓는 삶을 강조한 승려가 정작 자신은 풀 소유로 논란을 빚기도 하며 예수의 사랑과 을 설파하고 몸소 실천해야 할 목사가 예수를 앞세워 교회 이기주의를 선동하고 제 잇속을 위해 신자들의 돈과 성을 착취한다. 부처와 예수의 가르침을 몰라서 그럴까?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 걸까? 설사 교리와 율법은 줄줄 꿰고 있다 한들 체화되지 않는 앎은 진정한 앎이라고 볼 수 없으니 결국 제대로 아는게 아니리라. 이런들 저런들, 알고 지은 죄냐 모르고 지은 죄냐의 차이 일 뿐. 그것이 초래한 것은 실로 악하다. 자신들의 악덕한 행동으로 부처와 예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상을 심어주고 오해하게 만든 것이 첫째로 나쁘고, 자신은 물론 타인을 기만한 것이 둘째로 나쁘다.  


 시장에 쏟아지는 책은 또 어떠한가. 인문학이든 사회과학이든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쉽고 재밌는' 이란 표어를 전면에 내세우고 '성찰, 사유, 지식'은 덤으로 얻을 수 있다고 선전한다. 마치 풍성하고 윤기나는 머릿결을 만들어준다는 샴푸 광고에서 뇌에 필요한 영양소까지 공급해준다는 문구를 보는 것 마냥 우스꽝스럽고 기이하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쉽고 재미있는 게 성찰적이기까지 하다는 데에 동조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예컨대 나는 동화가 가진 매력과 가치를 결코 모르지 않는다.

 내가 기막혀하는 부분은 언제부터인가 '쉽고 재밌음'이 책의 지향점이자 마땅히 도달해야 할 목표가 되어 버린 것 같다는 데 있다. 그리고 별책 부록처럼 따라오는 성찰이라니. 어째 앞서 본 브뤼겔의 그림 <바벨탑>에서 공사의 선후관계가 뒤바뀐 것과 상황이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다는 아니지만 요즈음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라는 명찰을 단 책을 보노라면, 꼭 빈약한 내용물에 과량의 질소를 넣고 포장한 과자를 보는 것 마냥 그것의 얇실함과 뻥튀기됨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렇게 함부로 책을 쓰고 마구잡이로 출판하는 뻔뻔함은 뭔가? 이런 일이 성행하도록 출판 시장에 불을 지핀 소비자의 취향은 또 뭔가?

 심지어 요즘은 남이 대신 책을 읽고 요약을 해준다. 어떤 분야의 책이든 약 15분 안에 요약정리를 해준다는 광고가 사람들의 관심을 잡아끈다. 광고의 문구처럼, 누군가에겐 독서할 여가가 없는 바쁜 틈에 더없이 맞춤한 프로그램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독서란 게 뭔가? 그것이 영화의 예고편을 보는 일처럼 대충 줄거리만 알면 되는 것인가? 안 읽으면 안 읽었지 왜 굳이 알은 체를 해야 하는가? 가장 능동적이어야 할 독서를 남에게 의탁하여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 생각건대 진정 알려고 하는 자는 남이 들려준 줄거리만으론 만족하지 않는다. 헛공부에 들인 시간만큼 아까운 시간낭비도 없다. "문명에서 문맹으로 전도되는 현상을 목도"한다고 한탄한 아도르노의 말이 귓전에 맴돈다.

 

 얼마 전 한국사 강의로 유명한 한 인기 강사가 자신의 이름을 건 티브이 역사 프로그램에서 오류 투성이의 강의를 한 것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다. 워낙 인지도가 높은 강사이기 때문에 방송가는 아무 의심 없이 강의 내용의 사실 검토를 하지 않았고 강사 자신도 자기 검증을 하지 않은 채 혹은 개의치 않은 채 자신만만하게 비전문의 영역까지 넘겨보는 일을 강행하다 사고가 났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평가를 비롯하여 강사가 다룬 이집트의 역사 이야기가 실은 학계의 정설이 아니며 많은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는 어느 이집트 역사 전공학자의 글이 파문을 일으켰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프로그램은 한 회를 더 이어갔고, 이번에도 강사는 자신의 비전문 영역인 음악을 넘겨본 실수를 저질러 결국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자연히 그에실망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나 여전히 그를 옹호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된 입장은 "그의 강의는 재밌다", "덕분에 역사공부에 흥미를 붙였다", "애국심이 고취된다"라는 식이었다. 그의 강의를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는 나로선 뭐라 할 말이 없다만 이런 불명예스러운 구설수에 오른 가운데서도 꽤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걸 보니 그의 대중적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는 확실히 알겠다.

 내가 이 강사의 사건을 들먹이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에서가 아니라 앞서 몇 가지 지적한 사례와 함께 '키치Kitsch'를 설명하고자 함이다.


 통속은 참아도 키치는 못 참겠다며 키치라는 키워드로 예술과 삶의 문제를 날카롭게 해부한 철학자 조중걸은 다음과 같이 키치를 정의한다. "키치는 뻔뻔스러움의 자리에 허위의식이 자리 잡은 통속 예술이다." 그러나 키치는 순수예술에 기생한다는 점에서 통속 예술과 다르다. 통속 예술은 적어도 솔직하다. 그것은 자신들이 고급 예술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거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에 몰두하고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기만하지 않는다. 그러나 키치고급 예술 혹은 진지하고 세련된 예술로 받아들여지길 원한다. 그 감상이 지극히 피상적인 인식에 기초해 있고 어떤 긴장도 요구하지 않는 안일한 예술작품임에도 순수예술의 한 자리를 요구한다.3

 소위 예술의 전당 같은 큰 전시관에서 진행되는 예술적 행위에도 다분히 키치적인 요소가 많다. 자신의 전 존재를 다 바쳐서 해도 모자를 예술의 영역에 마치 계절에 따라 옷 바꿔 입듯 이따금씩 예술계에 발을 들여놓는 셀럽들과 그들의 팬층에 의지하여 전시를 기획하는 사태. '예술 없는 예술'은 버젓이 전시되고 허위의식과 소비욕구에 가득 찬 소비자가 그것을 감상하고 사들인다.

 물론 키치가 갖는 덕도 있다. 우선 대중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또한 문턱 높은 예술에 대중이 접근할 하나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것은 퇴행과 고착이다.4  허영을 중시하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예술 자체에 대한 관심은 지엽적인 것이 되고 무명이나 실력 있는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기회는 준다. 자연히 감상자의 개성과 안목을 높일 기회도 줄어드는 셈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더 위험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서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 모르게 한다거나 혹은 고차적인 심미안이라는 기만적 보증을 해준다는 것이다. 여기에 키치의 악덕이 있다. 하나는 통속이라는 고유의 악덕, 다른 하나는 기만이라는 악덕이다. 어떤 경우에는 제3의 악덕까지 있다. 키치의 생산자가 자기 작업의 사기성을 알면서도 고급 예술임을 위장하는 경우이다. 이때에는 거짓과 위선이라는 새로운 악덕이 추가된다.5 

 키치의 악덕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키치는 대상에 대한 감상의 정서가 그 자체로부터 감상자의 내면에 옮겨가도록 조장한다. 말하자면 한 화가가 색조와 분위기를 통해 달성해놓은 심미적 가치보다도 거기에서 단지 자기 욕구의 자극만을 볼뿐이다.6  스스로를 비평가 내지는 전문가의 위치에 올려놓고 그림 자체에 대한 내용보다는 "그림을 보는데 눈물이 났다"라는 식의 자기 감상을 늘어놓는 비전문가의 글을 나는 심심치 않게 본다.

 또한 어떤 예술애호가의 경우에는 예술이 주는 감동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예술을 감상하는 고상한 행위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예술을 추구한다. 이러한 이차성이 하나의 키치적 태도이다. 마치 연인을 사랑하기보다 오히려 자기가 사랑하고 있다는 그 정서를 소중하게 여기듯이 말이다.7  고통을 겪는 버려진 아이에 대한 관심과 동정심이 자신이 동정심 많은 사람이라는 자기만족적 허위의식으로 변질될 때, 그리하여 자신의 동정심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때 그것은 "이차적 눈물"이다. 키치는 무엇보다도 이 '이차성'을 조장한다.8  

 키치 시행자(생산자)는 짐짓 대단한 것인 위장하면서 있는 온갖 심각성을 더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감상자까지키치 속에 고착시키려 시도한다. 시행자는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과 때로는 자아도취적인 태도를 지으며 연기한다. 감상자는 그의 연기를 감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그리고는 박물관을 방문하고 그림을 감상하라는 방학숙제를 받아 든 학생들이 증거로 전시회의 입장권을 출하듯이9 강연 한 편 시청으로 블로그에서 읽은 글 한 편으로 '감상 잘 했다. 공부를 마쳤다.'라는 뿌듯함과 만족감을 받는다. 자부심이 넘치는 자기기만적 키치 시행자와 이를 받아들이는 수용자가 범람하면서 전체적인 삶이 가식과 속물, 기만 속에서 진행된다.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노고를 덜겠다고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10 는 거인의 업적에 기생함으로써 자신도 그 천재성을 공유하고 의기양양할 수 있겠으나 거인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혹은 그 거인이 허상으로 덩치를 키운 사람이었을 때에는 언제고 나자빠질 수 있는 수렁에 함께 빠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키치의 폐단은 사실 예술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키치에 둘러싸여 살고 있고, 키치적 인간관계를 맺고 살며, 키치적 삶을 영위하고 있다. 현대적 삶 자체가 키치인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전체주의이며 달콤한 전체주의이고 폭력 없는 전체주의이다.11  

 사람들은 제 몸을 맡길 때는 혹 돌팔이 의사를 만나면 어쩌나 하고 경계하면서 왜 자신의 정신과 관련된 일에는 이토록 부주의할까?

 이제 사이비는 모든 사람의 삶 속에 있으며 필연적인 예술이다. 진정한 예술은 가치 있는 것이긴 해도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것이고 화산과 같이 용솟음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냄비를 끓일 조촐한 가스불이고, 일상적 고달픔 속에서 단지 위안과 위로를 주는 자질구레한 아름다움이다.12  무엇하러 의미와 무의미, 참과 거짓을 따지고 묻겠는가. 아무런 긴장도 의구심도 없는 삶이 편하고 행복한 것을. 아주 잠깐 불편한 진실의 세계에 곁눈질할 순 있어도 다시 유튜브 먹방에 눈을 고정할 뿐이다. 아, 이거다! 하면서.

 고달픈 삶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선 키치를 끌어들이는 게 방편일 수 있다. 키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에게 헤로인을 주사하는 구세주"13 처럼 달콤하니까. 그러나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밀어내야 한다고 말한다면 내가 너무 주제넘은 걸까. 하물며 예수도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고 했거늘.

 너무 말이 길었다. 내가 현명하고자 했다면 말을 삼가는 게 좋았을 것이다. 단지 구경꾼으로서 무심하게 지켜볼 수 있었더라면... 악취미일지언정 "남의 거짓을 깨닫고도 말하지 않는 것에 묘미가 있다"는 명나라 설선의 말을 내 것으로 삼으며.


 



1)전수정,「피터 브뤼겔의 농민화 연구 -도시민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청구논문, 2012, 9쪽.

2)위의 글, 12~13쪽 참고.

3)조중걸,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프로네시스, 2007, 39~40쪽.

4)위의 글, 77쪽.

5)위의 글, 40쪽.

6)위의 글, 55쪽.

7)위의 글, 57쪽

8)위의 글, 59쪽.

9)위의 글, 73쪽.

10)위의 글, 86쪽.

11)위의 글, 81쪽.

12)위의 글, 131쪽.

13)위의 글, 70쪽.


[참고문헌]

전수정,피터 브뤼겔의 농민화 연구 -도시민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청구논문, 2012.

조중걸,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프로네시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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