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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Dec 24. 2018

내가 너희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기도의 언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세상은 꿈이 되고, 꿈은 세상이 된다(노발리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밤의 항구(자매)>, 1818-1820

 축축한 밤안개가 내려앉은 항구에 두 자매가 등을 돌리고 서 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이들은 하염없이 먼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두 자매의 시선이 닿는 곳을 숨죽여 따라가 본다. 짙은 쓸쓸함이 옷섶을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아련한 몽상에 빠져든다.

 자매가 서 있는 곳은 부둣가의 대교이거나 선착장 같아 보인다. 이들의 앞을 가로막은 긴 난간은 수평선이 되어 두 공간을 가른다. 난간 안쪽은 지상이자 현실 세계이고, 난간 바깥쪽은 지상 밖 공간이자 환상의 세계이다. 이러한 구도는 프리드리히가 세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표현하기 위해 정확히 계산된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인간과 신, 육체와 정신, 현실과 이상으로 세계를 양분한다. 수평선은 등을 돌리고 선 두 자매와 교차하며 수직으로 갈라진다. 난간 밖으로, 안개에 싸여 어슴푸레 보이는 교회와 정박한 배들도 두 자매와 나란히 수직을 이루고 있다.

 교회의 모습은 유럽 중세시대에 유행한 고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수직선이 강조된 형태에 끝이 뾰족한 아치가 활용된 고딕 교회는 신에게 가까이 닿고자 한 이들의 염원을 반영하여 하늘 높이 치솟아 있다. 교회 옆에 정박한 배는 낡고 오래된 집에 쌓인 먼지처럼 뿌연 안개에 에워싸여 마치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영웅처럼 아득하다. 아주 먼 과거 같기도, 아주 먼 미지의 세계 같기도 한 풍경. 이러한 환상적인 정조는 낭만주의 미술의 특징이다.

 낭만주의자들은 먼 곳을 향수 하고 동경했다. 여기서 먼 곳은 시간적으로는 과거를 의미하고 공간적으로는 먼 이국을 의미한다. 이미 낭만주의라는 어원 자체에 중세와 환상의 의미가 내재한다. ‘낭만적’이라는 단어는 일정한 형식이 없다고 생각되던 문학의 한 갈래인 중세의 기사도 문학 ‘로망스'에서 유래됐다.

 독일 낭만주의는 18세기 말, 슐레겔 형제가 처음으로 문인 또는 미술가에 대해 ‘낭만주의자’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시작됐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1798년「아테네움 단장」에서 낭만주의를 “결코 종국에 이르지 않으며 영원히 생성되어야 하는 운동의 문학”이라고 정의 내렸다. 이 말 속에는 명상적인 자기반성과 자연에 관한 관조적인 태도, 현실 너머의 이상을 설정하고 끊임없이 동경하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탐구하는 독일 낭만주의의 본질이 담겼다. 프랑스가 인간 감성의 격정적인 표출로 나타나는 움직임을 중시하였다면 독일의 경우 내적인 의미를 담는 이미지로써 고요하고 정적인 것을 선택했다.1

 이제 소설 속 세상을 거닐 듯, 이성의 불을 잠시 꺼두고 상상력의 불을 밝혀 <밤의 항구>를 다시 보자. 밤의 항구라는 현실 공간에 오버랩된 먼 곳을 바라보자.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 그리고 삶과 죽음이 한 시 한 공간에 뒤엉켜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라. 마치 ‘베일 쓴 여인의 얼굴’처럼 모호한 신비가 우리의 의식을 덮는 순간 우리는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진입한다. 육신의 눈이 감기고 영혼의 눈이 떠지는 순간이다.

 이제 첫눈에 얼른 보이지 않았던 장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밤의 항구>의 화면을 가로로 나누고 있는 난간 바로 뒤로 어렴풋이 십자가가 보인다. 그곳은 십자가가 세워진 무덤이다. 무덤가에 두 사람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들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을 애도하는 중이다. 그리고 조용히 죽음을 묵상한다.



죽음과 구원

이제부터는 신과 불멸에 대한 믿음 속에서 살아야만 하네. 온 사랑을 바쳐 연구해온 이 세상과 헤어지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겠지. 실패가 거듭되면 불안에 휩싸이는 순간들도 있을 거야. 하지만 인간에게는 주의깊은 정성으로 돌보면 어떤 이상한 에너지로 활짝 피어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네(노발리스).

 

 죽음은 자연 앞에서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미약하고 무기력한 가를 일깨운다. 프리드리히는 <해변의 승녀>에서 이 무한한 자연의 힘 앞에서 꼼짝없이 압도당한 인간의 모습을 일찍이 묘사한 바 있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해변의 승려>, 1808-1810

검푸른 바다 그 위로 짙게 깔린 해무, 금방이라도 폭풍이 휘몰아칠 듯 꾸물꾸물한 하늘. 피할 수 없는 불행이 곧 닥쳐올 듯하다. 그림 전반을 휩쓰는 불안감 탓에 숨이 턱 막혀올 지경이다. 가까스로 눈을 돌릴 찰나, 풀 한 포기 없는 절벽 위에 서서 이 공포스러운 대자연의 위협을 온몸으로 대면하고 있는 왜소한 승려가 눈에 들어온다. 승려는 두려움으로 얼음처럼 얼어붙어 서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 불가능한 대자연의 힘 앞에 그는 무력하게 굴복당했다.

 그러나 공포는 곧 놀라운 전율로 바뀐다. 자연 앞에서 마주한 인간의 한계는 자연에 대한 말 할 수 없는 경외심으로 우리를 전율케 한다. 바로 칸트가 말한 숭고의 경험이다. 자연의 측량할 수 없는 크기와 보이지 않는 권능으로 두렵고 떨리는 감정. 이것은 프리드리히의 예술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정념이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일몰(형제)>, 1830-1835

 자연에 대한 화가의 경외는 보다 심화되어 이제 자연의 근원을 모색하는 이른다. 그것은 죽음과 함께 우리의 신적인 기원에 대한 질문이다.

 프리드리히 그림에서 묘사된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질서임을 넘어서 육체와 영혼, 지상과 지상 밖,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매개이다. 죽음은 양립할 수 없는 두 영역을 연결하는 중재적 역할을 하며 인간과 신이 하나가 되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선 반드시 지나야 할 관문이다.

 이는 인간의 보편적인 죽음의 의미를 예수의 죽음과 같은 의미로 확장시킨다. 하나님의 현현인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의 몸을 입고 인간이 되어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보인 것처럼, 프리드리히가 묘사한 죽음은 유한함의 끝에서 무한함의 시작을 연다. 구원에 대한 약속은 <밤의 항구>에서 십자가 무덤가를 돌며 죽은 이를 위해 기도를 올리고 있는 사람의 슬픔을 위로한다. 



새벽별

 예술이란 기도의 언어다(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월출>, 1821

 그래서일까. 프리드리히의 그림 속에서 말없이 풍경을 바라보는 저 뒷모습들이 마냥 쓸쓸해 보이지는 않다. 무언의 위로, 무언의 확신, 무언의 기대가 저들이 바라보는 저 하늘에 떠 있다. 한 조각의 달로, 한 줌의 석양으로. 그리고 저들이 맞잡은 저 두 손!

 <밤의 항구>를 다시 본다. 이제 두 자매의 모습이 달리 보인다. 왼쪽에 선 자매가 오른쪽 자매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얹는다. 이제 두 자매는 진실로 하나가 된다. 더 이상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신음하지 않고 다만  침묵 속에서, 이성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신성의 목소리에 잠잠히 귀 기울인다.

그러자 이윽고 보이기 시작한다. 두 자매의 머리 위로 조용히 떠오른 기도의 응답.

내가 정녕 너희에게 새벽별을 주리라.2)



1) 박소영, 「독일낭만주의 회화에 나타난 멜랑콜리」, 영남대학교 대학원 미술사미학과 석사학위 청구 논문, 2010, 11~12쪽에서 참고.

2) 요한계시록 2:28


[참고문헌]     

백내승,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그림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청구 논문, 1996.

이화진, 「C. D. 프리드리히(C. D. Friedrich)의 풍경화에 나타난 공간 구성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청구 논문, 2003.

알베르 베갱, 이상해 옮김, 『낭만적 영혼과 꿈』, 문학동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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