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징표 VS. 가망없는 정신병-
구약의 전도서는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삶의 무상함 그리고 삶의 유한성', 바니타스(Vanitas)에 대한 자각은 우리의 삶 중심에 이미 죽음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견딜 수 없는 ‘멜랑콜리(melancholy)’를 야기한다.
멜랑콜리란 단어는 사람의 기질을 인간의 몸속에 흐르는 네 가지 액체(피, 점액, 노란 담즙, 그리고 검은 담즙)으로 구분했던 고대그리스의 의학 용어 중 검은 담즙을 뜻하는 멜랑콜리아(melancholia)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가 멜랑콜리를 포함한 네 가지 체액설을 하나의 의학 이론으로 확립하였다. 히포크라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몸에는 “혈액, 노란 담즙, 검은 담즙, 점액”의 네 가지의 체액이 있으며 이것은 서로 다른 네 가지 기질-성마른(choleric), 침착한(phlegmatic), 낙천적(sanguine), 멜랑콜리(melancholy)-을 형성한다. 이 가운데 검은 담즙이 과도하게 넘쳐흘러서 어둡고 우울한 성격을 소유한 자를 멜랑콜리커라고 부른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관점에서 볼 때는 어불성설이다. 검은 담즙은 존재하지도 않는 체액일뿐더러 이 사실을 고대 그리스인들이 과연 몰랐을지도 의문이다. 생각건대 아마도 인간의 고통으로 야기된 내면의 어두움을 검은 담즙으로 상징했으리라.1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도 멜랑콜리를 천재의 징표이자 신의 축복으로 칭송하였다. 여기 알브레히트 뒤러의 유명한 동판화 <멜랑콜리아 1>를 보라. 천사가 주먹을 꼭 쥐고서 머리를 괸 채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빠져있다.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는 그림 속 천사의 모습을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고집스레 움켜 쥔 혼란스러운 사색가의 모습이다”, 라고 묘사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미술사에서 통상 ‘멜랑콜리 포즈’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얀스의 ‘인적 없는 곳의 세례자 요하네스’, 뒤러의 ‘멜랑콜리아 I’, 도메니코 페티의 ‘멜랑콜리’, 라그네르의 ‘멜랑콜리’, 고흐의 ‘의사 가셰의 초상’, 뭉크의 ‘멜랑콜리 III’ 등을 포함한 여러 서양예술작품의 공통점은 사색적인 자세와 손을 턱에 괸 모습을 하고 있다.2
여기서 ‘비범한 사람들’이란 낭만주의 시대에 와서 위대한 예술가이자 천재로 이해된다. 낭만주의자들이 볼 때 비범한 천재들은 응당 멜랑콜리라는 성스러운 질병을 앓게 마련이었다. 이들의 몸속에서 과잉 생산된 검은 담즙은 종잡을 수 없이 특별한 기질을 갖게 하는 것으로, 마치 술에 취하면-더없이 친절해지거나 도리어 난폭해지는-평범함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듯, 지속적으로 보통의 상궤에서 벗어나게 한다. 어둡고 우울하며, 정상 내지는 중심부에서 홀로 떨어져 나와 소외되고, 자기학대를 일삼으며 점차 광인이 되어 간다.
운명은 가끔 우리에게 광기 한 잔을 마시도록 제안한다(빅토르 위고).
이후 멜랑콜리는 세기병(mal du siècle)이라는 시대적인 징후로까지 나타났다. 멜랑콜리 증상과 현대성(Modernity)과의 관계를 논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특히 보들레르의 역할이 컸다. 보들레르에게 멜랑콜리는 되찾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상실의 감정이자 존재의 덧없음과 시간의 비가역성을 계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피폐해진 세기의 아이야, 난 네 어미를 보고 있다. 무거운 세월의 더미를 거울 앞에 기울이고, 너를 젖먹인 가슴에 솜씨 있게 분칠 하는 네 어미를!”(보들레르).
그러나 중세시대에는 멜랑콜리가 커다란 죄악으로 치부되었다. 이 시기에 멜랑콜리는 관심이 없는 무력한 상태로, 13세기에는 나태로까지 여기었다. 일례로 단테는 ‘이성의 선을 잃은 고통스러운 군중들’을 ‘비탄의 도시’(<지옥편>, 제 13곡)에 배치시켰다.3
“그가(벨레로폰) 모든 신들의 미움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의 심장을 뜯어먹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행로를 피해 다니며 홀로 아레이옴 들판을 방황했다”(아리스토텔레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유명한 저서『죽음에 이르는 병』,『불안의 개념』에서 인간의 불안과 절망의 개념을 기독교적 교리와 신앙에 기반하여 해석하였다. 그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태초의 인간인 아담의 원죄로부터 시작한다. 멜랑콜리는 신의 뜻을 저버리고 악의 유혹에 넘어가 영원한 생명을 잃고 죽음에 이르게 된 아담의 슬픔이다. 아담의 죄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이 자신의 본향을 갈망하고 본래의 자아를 찾고자 괴로워하는 심정을 의미한다. 유독 자기 반성적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성의 인간들이 이 고통을 겪는다.
“절망은 자기 자신의 병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형태를 보인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을 소유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지 않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는 형태이다”(키에르케고르).
한편,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멜랑콜리한 ‘기분’을 통해 자신과 주변 세계를 자각하고 그에 대해 질문하고 탐문 한다고 생각했다. 멜랑콜리로 인한 자각은 자기고양을 넘어 현실을 직시케 함으로써 보편적 세계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4 그리고 이 ‘진리를 바라보는 예리한 눈’과 ‘우울한 열정’은 비범하고 창조적인 예술을 탄생시킨다. 멜랑콜리는 예술가에게 창작이 원천으로써 최고의 지성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야수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런 죽음의 집으로 달려간다면, 그것은 죄일까?(윌리엄 셰익스피어).
상실된 대상으로부터 오는 슬픈 감정, 멜랑콜리아. 그런데 슬픔의 이유를 모르는 슬픔도 있다.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당최 알 수 없는 가운데서 느끼는 비탄. 상실된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애도도 불가능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슬픔과 멜랑콜리」에서 이 애도의 가능성, 즉 다른 대상으로 리비도를 전이하거나 슬픔을 대체하기 위해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서 고통의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자아는 자신을 리비도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주장했다. 이때 자아는 상실한 대상과(감정적으로 혹은 실제로 잃어버린) 자기 동일시를 이루며 자신이 상실의 대상이 되게끔 한다. ‘대상의 자기 동일화’를 통해서 자아가 리비도의 대상과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것. 이 기저에는 근원적 나르시시즘이 숨어있다.
나를 흔들고 물어뜯는 게걸스러운 아이러니 덕분에, 나는 신성한 심포니 속에 끼어든 불협화음이 아닌가? 아이러니는 내 목소리 속 잔소리하는 여자! 그것은 내 모든 피, 이 검은 독! 나는 심술궂은 여자가 제 모습 비춰보는 음침한 거울(보들레르, 「스스로를 벌 하는 자 L'Héautontimoruméno」)
과거에 갇혀 있다거나, 나르시스의 샘에 빠져있다거나, 사랑을 저버린 대상에 대한 슬픔에 젖어있다거나, 오히려 깊은 자기혐오에 빠져있다거나, 끊임없는 자기 상실감으로 고통받게 하는 멜랑콜리의 정념은 한없이 과민하고 끝없는 공상에 쉴 틈 없는 예술가들에게 때로는 신의 축복이요 때로는 악마의 저주이다.
그러나 자신의 상처받은 자아의 치유와 정체성의 보존을 위해 예술을 한다고 여러 번 고백한 바 있는 현대 예술가 루이즈 부르주아의 말처럼, 이 우울함이야 말로 예술가들에게 가장 큰 창작의 동력이 되었으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상실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지배하는 멜랑콜리적 기질과 그것의 특성에 몰두하며 창작의 결실을 맺는 것이다. 우울함, 예민한 직관력은 때로는 사람을 미치게 하고 또 때로는 더 높은 경지의 사고에 이르게 한다, 라고 디드로도 말한 바 있거니와.
이와같이 보건대 멜랑콜리, 그것은 일순간 모든 시간의 지평을 닫아버리는 동시에 까마득한 영원의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리라. 멜랑콜리 속에서 모든 것이 소멸하고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생성한다. 때로는 천재의 징표로 때로는 가망없는 정신병으로 불리면서.
1) 김동규,「하이데거 철학의 멜랑콜리 — “존재와 시간”에 등장하는 실존론적 유아론의 멜랑콜리, 하이데거 연구」, 2009, 제19집, 88쪽.
2) 김동규,『멜랑콜리아 — 서양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문학동네, 2014, 27쪽.
3) 강은실,「멜랑콜리 논의를 통한 루이스 부르조아(Louise Bourgeois)의 시리즈 분석연구」, 2012.
4) 이상미,「멜랑콜리적 기질을 통한 작업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 논문, 2016. 1쪽.
5) 박정자,『잉여의 미학』, 기파랑:에크리, 2014, 140쪽.
[참고문헌]
강은실,「멜랑콜리 논의를 통한 루이스 부르조아(Louise Bourgeois)의 시리즈 분석연구」, 2012.
김동규, 「하이데거 철학의 멜랑콜리 — “존재와 시간”에 등장하는 실존론적 유아론의 멜랑콜리, 하이데거 연구」, 제19집, 2009.
김동규,「프로이트의 멜랑콜리론 -서양 주체의 문화적 기질(disposition)론」, 2010.
김동규,『멜랑콜리아 — 서양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문학동네, 2014.
박정자,『잉여의 미학』, 기파랑:에크리, 2014.
이상미,「멜랑콜리적 기질을 통한 작업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 논문, 2016.
키에르케고르, 강성위 옮김,『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유혹자의 일기』동서문화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