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든 기울인 시간에 비해 성과가 미약할 때 우리는 속상하다. 지금껏 기울인 공이 아까워 중도 포기 하고 싶진 않지만, 앞으로 더 쏟아부어야 할 시간을 생각하면 계속 밀고 나가는 게 능사는 아니다.
이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는 관계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선 기꺼이 자기 시간을 내어준다. 만남을 위해 준비한 시간, 그 만남을 위해 발생한 기회비용까지 다 무릅쓰고서 기꺼이.
나의 소중한 시간을 고마워하거나 적어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이에게 곧장 거두어들이는 것도 바로 시간이다. 그만큼 시간의 소비는 내가 상대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또 상대는 나를 얼마나 생각하는 지를 알려주는 척도가 된다.
혹 지금 내 옆의 연인이 날 소중히 여기는지 아닌지가 궁금하다면 상대가 내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쓰는지를 보자. 물론 애정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도무지 상대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는 사람도 분명 있다. 오히려 연인과의 건설적인 미래를 생각해 당장에 못 보는 아쉬움은 뒤로하고 일에 매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를 이해하고 기다려주기 위해서는 '신뢰'가 필요하다. 상대를 믿어주는 건 강요로 되는 것도 아니요 설득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바빠서 그래. 이해해죠."라며 번번이 약속을 미루는 연인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고 의심이 든다면, 그런 자신을 자책하지 말고 관계의 민낯을 직시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큼 진실한가?
[예시]
며칠 전 사귀던 남자와 헤어진 여자가 있다. 사실 이들이 이별하는데 내가 한몫 거든 듯싶다. 웬만해서는 남일에 관여를 잘 안 하는데 아무리 봐도 그 남자는 여자를 너무 함부로 대하고 있었다.
발단은 이러하다. 이들은 사귄 지 석 달 정도 됐다. 소개팅으로 만났고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사귀자고 했다. 여자는 회사원이고 남자는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여자는 최근에 회사 동료와 일주일간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남자 친구에게 주려고 선물도 사 왔다. 그런데 여자가 귀국한 이래로 열흘이 다됐는데도 남자는 시험 준비 때문에 바쁘다고만 하고 만나자는 약속을 안 하는 것이다.
의기소침해진 여자는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남자에게 카톡 문자를 보냈다. 얼굴을 못 본 지 3주 째였다.
여자: "오빠, 나 생각해 봤는데 내가 여행 다녀오기도 했고 오빠가 또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고 이래저래 바쁜 일정 있다길래 이해했거든... 근데 오빠가 나한테 잠깐 시간 내는 거 그렇게 어려운 일이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내가 이번에 언제 보냐고 전화로 물어봤을 때도 오빠는 봐야지 말만 하고.. 지금 솔직히 나 볼 생각도 없어 보여. 내 나름대로 오빠를 이해한다고 노력했는데...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여자는 남자에게 몹시 서운했다. 그렇지만 절대 헤어지자는 의도에서 쓴 글이 아니다. 그런데 남자는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다.
남자: "네가 너 자신에게 회의감이 든다면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네. 내가 너 본다 하고는 뒷전으로 미루고 다른 사람들 만나는 것도 아니고 내 한 몸 챙기기에도 버거워서 그런데 그거를 그렇게 받아들이면 내가 더 뭐라 할 수 있는 건 없네."
여자는 이 내용을 캡처해서 내게 카톡으로 보냈다. 너무 서운하고 기가 차서 뭐라고 대꾸라도 하고 싶은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연애를 한다면서 늘 혼자있던 여자를 봐왔던 나는 이 남자의 글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글을 써서 여자에게 보내며 이렇게 답신을 보내보는 게 어떻겠냐며 조언했다.
필자: "내가 쓴 글의 의도를 이해 못 할 만큼 오빠가 어리석다고 생각 안 해. 그런데도 내 말을 단순한 칭얼거림으로 치부하고 오히려 배려심 없는 사람으로 몰고 가는 오빠의 행태에 큰 실망감을 느껴.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라고 했니? 오빠의 상황을 존중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나한테 할 소리는 아니지. 배려를 받고 있음에도 배려받는 줄 모르는 사람한테 부어줄 만큼 내 아량이 남아돌지 않아. 오빠가 얼마나 대단한 공부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자신의 비겁함으로부터 회피하려는 행동은 미성숙하고 창피한 일이란 걸 알길 바래."
나는 이들의 애정이 서로 얼마나 깊은지 모른다. 단지 여자와 남자의 카톡 문자에서 느껴지는 글의 온도에 반응하여 쓴 글이므로 어쩌면 너무 몰인정하게 남자를 몰아세운 건지도 모르겠다.
또 내가 일러준 대로 여자가 남자에게 카톡 문자를 보냈는지 여부도 모른다. 여하간 그날 이후 이 남자는 여자의 인생에서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여자는 내게 말했다. "어쩐지 그동안 사귄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Edward Hopper, Room in New York, 1932
어느 남녀관계에서나 사이가 좋든지 나쁘든지, 자기 걸 버리고 타자에게 맞춰줬을 때 본인이 감내해야 하는 외로움과 억울함이 있다. 대가를 바라지는 않았으나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 내 마음이 무참히 밟힐 때하염없이 서운하고 우울해진다. 혹여나 기대하고 기다리는 내 모습이 한심하고 구차스럽기까지 하고.
그러다 기어이 맞닥뜨린 이별의 순간, 너무나 허무하고 화가 난다. 비단 끝나버린 관계에 대한 상실감 때문만은 아니다.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면 상대방에게 쏟아부은내 시간에 대한 아까움 때문이다. 휴대폰을 쳐다보며 오매불망 기다렸던 시간, 상대의 눈치를 보며 조마조마 불안해 했던 시간, 그리고 상대를 위하느라 나한테 오롯이 쓰지 못한 시간까지...
만약 당신이 지금 연애를 하는 중임에도 외롭다면 내 사랑을 존중받고 내 존엄을 지키고 위해 상대가 내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쓰는지를 봐야 한다. 나를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분명 나를 위한 시간을 '어떻게 해서든지' 마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