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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Sep 28. 2023

원래 가족이 제일 힘들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운명공동체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내가 머리 숙여 사과하게 되고 내 고민이 아닌데도 잠 설치며 고민하게 되는 사이, 가족은 그런 사이이다.

  골치 아픈 일이니 잠시 잊고, 최대한 나중일로 제쳐두고, 다른 일로 한눈을 팔려고 해도 맘 편히 그럴 수 없다. 엄마도 나고 아빠도 나고 형제도 나니까. 나는 ‘우리’니까.

 우리는 가족 구성원과 끈끈하게 뭉쳐있다가 그것이 너무 버거워 어쩔 땐 한없이 떨어져 있고 싶다는 감정이 들기도 한다. 독립된 개별성의 추구와 동시에 꼭 붙어 지내려는 연합성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타인과의 사이에서 느끼는 것 보다도 가족 내에서 더 지독한 감정의 골을 느끼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 가족관계의 문제는 당연하게 떠맡은 -사실 떠밀린- 역할 분담에 있다. 엄마로서, 아빠로서, 딸로서, 아들로서, 형으로서, 동생으로서, 저마다 사회적 통념상 마땅히 기대하는 역할을 군말 없이 수행한다. 더러는 건강이나 재정 상태와 같은 가족 내 특수성 때문에 누구의 몫까지 어쩔 수 없이 대신 떠맡기도 한다.  

 개인의 행동양식은 -심지어 인격마저- 이러한 가족 내의 지배적인 정서와 공동의 목표에 의해 관리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내게 부과되는 인정과 요구에 부응한 것이다. 하여 자칫 위태로울 수 있다. 가족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 억압하거나 침해받은 자아가 우울증이나 성격장애의 문제 등으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가족 내에서 나의 개인성을 인정하지 않고 지나친 결속만을 요구하면 나는 더욱더 답답함을 느끼고 스트레스가 증폭된다. 그 중압감에서 벗어나고자(혹은 전가하고자) 타인, 애완동물, TV 시청, 쇼핑 등 애착거리를 찾는다. 나의 상실이 가중될수록 나 밖의 거리에 대한 애착 증세도 덩달아 커진다.

  이는 표면적으로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의 삶을 타자에게 의지/의탁하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론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이자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꾀하는 셈이 된다(그러나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진정으로 도피할 수 없다!). 점점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성숙한 자아의 발현이 늦어지고 당장에 내 고통을 임시라도 덜어줄 만한 제삼자에 대한 가시지 않는 갈증과 집착만 가중될 뿐이다.

 그런데 가족 내에서 내 독립성을 지키고 정서적 중립을 갖는다는 게 가당하기나 할까?

 

Edgar Degas, The Bellelli Family, 1860-62


부모의 불안한 감정의 투사 대상이 된 자녀


 가족 치료의 창시자 보웬(M. Bowen)에 따르면, 개인이 성장하고 발달하기 위해선 복잡한 가족의 감정 덩어리로부터 자신을 구별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자기 분화"(differentiation of self)라고 명명한다.

  자기 분화란 개인이 타인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에 따라 기능하는 것을 배우는 걸 뜻한다. 이는 정신적인 개념인 동시에 대인 관계적 개념으로서, 정신적으로는 사고와 감정을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며 대인 관계적으로는 자신과 타인 사이의 분화를 의미한다.

  분화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편한 감정들을 스스로 잘 처리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밀착되지 않는다. 반면에 분화 정도가 낮은 사람일수록 불편한 감정들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한다.(김영숙: 2015) 

  자기 분화의 수준은 개인이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그의 스트레스를 얼마나 투사하는 지를 보면 가늠하기 쉽다. 만일 부모가 낮은 분화 수준을 가졌다면 자녀 또한 낮은 분화 수준을 갖기 쉽다. 특히 부모의 정서 유형에 민감한 특정 자녀는 더 깊게 가족 투사의 강요를 받기 때문에 치명적이다. 부모가 자신의 불안을 자녀에게 투사함으로써 자녀는 부모가 가진 불안과 결속에 대한 압력을 그대로 전달받기 때문이다.

 가령 부모가 갈등상태에 있으면 긴장된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불안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자녀 -특히 부모의 정서 유형에 민감한 특정 자녀- 는 제삼자의 역할자로 개입한다. 자녀는 부모의 관계 속으로 들어와 두 사람의 화해를 도모하고 부모의 갈등을 대신 짊어짐으로써 갈등을 줄이고 되도록 안정된 가족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이때의 자녀는 부모의 불안한 감정의 투사 대상이 된 탓에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기보다는 부모의 기대에 부합하는 자아를 형성하고, 직간접적으로 강요받은 합당한 행동방식을 보임으로서 가장된 자신을 더 많이 형성한다.

 특히 장남과 장녀들은 쉽게(떳떳하게) 자신의 개별성을 갖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장남과 장녀들이 불안해지면 유독 더 권위적이고 규칙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이는 데, 부모로부터 감정의 투사 대상이 되어 부모의 불안이 전이된 탓이 크다. 부모의 기대 수준이 높은 위치에 있는 자녀일수록 자기 분화 수준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은 심리적으로 가족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삶을 추구하기를 어려워하고, 유사시 부모의 역할을 대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더불어 다른 형제들에게도 개별성의 추구보다는 가족이라는 공생 체계에 맞춰주기를 기대한다. 이 때문에 형제들 간의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가족문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기 분화의 수준은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

  가족체계 안에서 한 개인이 적절하게 독립성을 이루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을까?


Frida Kahlo, My Grandparents, My Parents, and I (Family Tree) , 1936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서  

 

 오랜 시간 학습된 가족 내에 나의 역할, 그것이 불합리하든 어쩌든 볼멘소리 않고 묵묵히 떠맡아 왔지만   이따금 별것도 아닌 사소한 말 한마디에 몇 년치 묵은 감정들이 벌컥 튀어나올 때가 있다.  마치 식체에 걸린 것처럼 참을 수 없는 억울함과 분노에 숨이 막히고 속이 답답해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 놓은 말을 격하게 토해낸다. 나만 양보해야 해? 나는  좋아서 그동안 참았는 줄 알아?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내뱉고 나면 속이 시원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미안해진다. 엄마가 슬퍼하니까. 아빠가 미안해하니까.

 그러니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정작 내 속마음을 가장 털어놓기는 힘든 사이이다. 내가 근심하면 가족도 근심하고, 가족이 힘들어하는 걸 보면 나도 힘드니까.

  아무런 기대와 바람 없이 그저 응원하고 사랑만 할  수는 없을까?

 가족을 등한시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잃지 않는 일. 우리는 성공할 수 있을까?




[참고문헌]

김영숙, <보웬의 가족치료 이론을 적용한 가족관계 회복에 관한 연구>, 2015

김수영, <가족치료 이론을 중심으로 한 야곱 가족의 분석: 보웬과 미누친의 이론을 중심으로>,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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