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어떤 범주가 돼주었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름만 읊조려도 맘 한구석이 따뜻해지면서 고마운 사람이 있고 얼굴만 떠올려도 미간에 주름이 잡히며 거북 해지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상대에 대한 감정이 좋고 나쁨으로 분명하게 나뉘는 데도 막상 상이한 두 상대에게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물질적, 정신적)에는 큰 구분이 없다는데 적잖게 놀라게 된다. 나는 정녕 관계의 중요도를 제대로 분간 못하고 있는 걸까?
놀랄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보고 싶은 사람보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특히 정신적으로- 훨씬 더 매여있음을 깨닫는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가해자로, 만났다 하면 나는 -그것이 감정적이든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어떤 식으로든지 피해를 입게 되지만, 실상은 가해자의 부재 시에도 끊임없이 그의 가해(과거-현재-미래)를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이렇게 스스로가 만들어낸 상념은 곧장 "기브 앤 테이브/ 희생과 대가/ 인과응보"의 주제로 이어진다. 그러다 이내 걷잡을 수 없는 화염처럼 분개와 억울함으로 가슴속이 활활 타오름을 느낀다.
흔히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로 알고 지낸 세월과 오랜 기억들이 중요하다지만 "좋은 관계"를 가리는 데는 그리 결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 다만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을 때 발목을 잡는 게 그놈의 세월에 깃든 정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최악의 관계는 이대로 지속하기는 싫은데 막상 끊어버리기엔 맘에 걸리는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이기적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A New Earth』)가 지적하기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은 상대로부터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는 욕구와, 자기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의지 외에는 대체로 상대에게 무관심하다. 이를테면 본인의 요구사항이 있을 때나 속풀이 할 상대가 필요할 때는 집요하리만큼 연락 해대지만 평소 나의 안부를 묻는 일에는 게으르고 나의 고민이나 사정에 둔감한 사람이 그러하다. 혹 경쟁심이나 시기심을 부추길 만한 일이라도 있으면 잠시 관심 갖을지 모르지만.
특히 어린이처럼 미성숙한 "유아적 나르시시트"는 주변 사람들을 오로지 자신의 요구를 받들어줄 한결같은 보호자 및 봉사자쯤으로 여긴다. 상대에게 자신의 필요에 부합하도록 어떤 역할을 맡기고, 상대가 -요구나 명령을 따라서가 아니라- 선의로 베푼 호의와 배려를 "주인 된 자격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과도한 자기애로 이루어진 이기심이다.
이런 "아기 폐하"(마사 너스바움Martha C. Nussbaum,『혐오와 수치심』)는 심지어 상대의 주체성을 침해하고 선택권을 박탈시키는 일에도 서슴지 않는다. 가령 '널 위해서 그랬어, 너한텐 이게 좋아'라는 식으로 표면적으로는 나에 대한 애정으로 나의 실익을 위해주는 척하나 실은 본인의 뜻을 강제하기에 여념없다. 이러한 결정에는 다분히 본인 위주의 이해(소득이나 결실)가 걸려 있게 마련이다. 설사 그의 이기적인 속셈이 들통나거나 피력한 주장의 설득력이 부족해서, 혹은 나의 형편과 상황이 여의치 않아 요구를 들어 주기를 거절 하면, "나에게 좋은 것은 너에게도 좋다. 그러니 해달라"는 식의 뻔뻔한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거절하기 힘든 관계, 거절하기를 힘들어하는 사람의 성향을 이용한 교묘한 노림수이다. 이런 횡포는 가깝고 친밀한 사이에서 더 빈번히 더 심하게 일어난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사랑을 빙자한 이기적인 행동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십상인 것은 사랑에 대한 번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사람에게 사랑이란, "사랑하므로" 넌 내 뜻을 따라야 한다는 "군림의 정당성"과, 넌 내 거야 라는 식의 "자기 소유"의 확인이다. 그러므로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자신을 위한 봉사자가 많아지니 말이다.
그러나 사랑을 돌봄과 나눔, 배려와 희생, 온유와 인내라고 여기는 사람은 상대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깊은 결속과 함께 일종의 책무를 느끼게 된다. '나를 사랑한다는데... 에잇, 해주자. 이해하자' 라며 갈등에 부딪힐 때마다 넘기고 넘기는 것이다. 때때로 옹졸한 맘이 드는 자신을 나무라면서. 그러나 실상은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던진 사람이 쳐 놓은 덫에 걸려든 것인데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이 덫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그 사람이 건낸 사랑한다는 말을 내가 믿는 사랑의 의미에 대입한 탓이다. 이기적인 사람에게 빈번히 실망하고 배신감마저 들 때가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직면하면서 도리어 미안함을 느꼈다. 갈등에 부딪혀 힘들 때마다 '혹시 그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내가 너무 성급하게 단정 지었던 건 아닐까? 내가 바라보고픈 대로? 그럼 상대를 이기적이라고 탓할 자격이 나한텐 없네'라며 자책도 일삼았다.
그러다 어느 날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때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에 몰두했다. "지금 이 순간" 그를 향한 내 감정은 "불편함, 불쾌함, 서운함, 배신감"이었다. 자연스레 과거를 회상하게 됐다. 귓가에 맴도는 그의 말과 말투, 잊혀지지 않는 표정과 행동, 내가 무수히 양보하고 헌신했던 날들, 그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제대로 사과 한번 받아보지 못했던 일들...... 그러다 또 간간히 잘해준 기억도 난다. 그때의 고마움과 감동, 놀람...... 이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그와의 관계를 끊느냐 마느냐... 그러던 중 어느 책의 한 구절에서 갈필 못 잡는 내 맘에 이정표가 되어줄 가르침을 얻었다.: It is at this moment that you can decide what kind of relationship you want to have with the present moment. The present moment is inseparable from life, so you are really deciding what kind of a relationship you want to have with life.(Eckhart Tolle, A New Earth)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말고 토로하는 일, 그리고 맺고 있는 관계를 솔직하게 점검해보는 일은 자신 없는 일에 정면돌파해야 하는 것처럼 껄끄럽고 흡사 사생결단을 내리듯 힘겨운 일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물러설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나 스스로를 존중하려면 괴로움은 덜고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건 해보아야 할 게 아닌가.
그러니 위의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침을 다시 살펴보자. 지금 이 순간 결정해 보자. "나는 현재 어떤 관계를 원하는가?" 현재는 삶과 분리될 수 없다. 현재가 곧 삶이다. 그러므로 잘 생각해야 한다. 현재 이 관계가 앞으로 내 삶 가운데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어떠할지를.
모두가 예수가 될 수는 없다. 모두가 성인이 될 필요도 없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만 해도 여간 잘 사는 게 아니다. 인간다움이란 고마운 일에는 고마움을 표하고 미안한 일에는 미안함을 표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 거짓으로 남을 현혹시키거나 속이지 않으며, 공감과 동정심을 잃지 않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하물며 애정의 관계에서 이 최소한의 도리와 경우도 지켜지지 않는다면 더이상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특히 안하무인의 사람에게 배풀 관용의 한계에 가책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내 인생에 어떤 범주가 돼주었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름만 읊조려도 맘 한구석이 따뜻해지면서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고 얼굴만 떠올려도 미간에 주름이 잡히며 입맛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이제는 참지 말고 관계 정리를 해야 할 순간이다.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어려운 일에 위로하고 좋은 일에 함께 기뻐하는 그런 좋은 사람들과의 친교에 보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