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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바리 Dec 28. 2020

적당 주의자가 본 역대급 악마 마이클 조던

넷플릭스 <더 라스트 댄스>

농구의 신 조던을 넷플릭스에서 만난다. (출처 : 넷플릭스)


나는 마이클 조던의 농구 경기를 보지 못했다. 88년에 태어난 나에게는 코비 브라이언트가 신이었고, 스테픈 커리가 슈퍼스타였다. 90년대를 지배한 시카고 불스 왕조는 마치 교과서로 배운 로마 시대 황금기 '팍스 로마나(Pax Romana)'처럼 와 닿지 않는 옛날이야기였다. 하지만 농구팬이라면, 아니 농구를 하나도 몰라도 우리는 조던의 시대 속에서 살고 있다. 역대 최고의 선수(GOAT, The Greatest of All Time) 분야는 물론이고, 역대 최다 득점, 우승 등의 기록에 어김없이 조던은 등장한다. 또 "동점 상황 마지막 슛은 누구에게? 역대 최강 드림팀은?" 따위의 '만약에' 게임에선 "애매할 땐 조던"이라는 해답까지 퍼져있다. 한편 농구 외적으로도 나이키 럭키 드로우 추첨일이 되면 많은 이들이 신발 장수, 아니 '에어 조던'의 가호가 내게 전해지길 기도한다. 희소성 있는 신발을 정가보다 더 비싼 값에 파는 슈테크(슈즈+재테크)가 유행할 줄은 1985년 에어조단 1이 처음 나왔을 때는 미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농구'와 '브랜드'를 아예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은 슈퍼스타 마이클 조던. 그의 전성기를 그린 ESPN 독점 다큐멘터리를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그것도 10편이나? 망할 코로나 19로 모든 스포츠가 멈춘 상황에서 내게 가뭄에 단비 같은 선물이었다.


<더 라스트 댄스>는 경기 하이라이트, 인터뷰는 물론이고 연습장, 락커룸, 원정버스, 퍼레이드 등 가장 가까운 곳에서 조던의 발자취를 기록한 500시간짜리 미공개 영상이 담긴 다큐멘터리다. 특히 거친 코트 위에서 겁 없던 조던의 신인 시절부터, 중후하게 앉아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 하는 CEO 조던의 현재를 오가며 조금씩 1997/98 시즌으로 다가간다. '더 라스트 댄스'는 시카고 불스 감독 필 잭슨이 선수들에게 나눠준 노트에 쓰인 단어였다. 쓰리핏(3연속 우승), 조던의 은퇴와 복귀, 2연속 우승. 더할 나위 없이 최고의 전성기를 구사한 시카고 불스는 아이러니하게도 피할 수 없는 이별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빌딩을 원하는 단장과 선수, 코칭스태프와의 깊은 불화(특히 계약에 불만족스러웠던 스코티 피펜), 노쇠화 된 주축 선수들의 부상이 불스의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결승전 상대는 래리 버드 감독과 최고의 3점 슈터 레지 밀러가 버티는 도전자 인디애나 페이서스였다. 어쩌면 아름다운 이별은 그저 모두의 바람으로 끝날 상황이었지만, 조던은 늘 그렇듯 '더 샷'으로 두 번째 쓰리핏, 6회 우승을 완성하며 승리자로 코트를 떠났다.


조던의 훌륭한 조력자 역할을 해낸 피펜, 로드맨 (출처 : 넷플릭스)


고열에 시달리는 조던이 38점을 쏟아부으며 기어이 승리를 이끈 '플루 게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시작한 야구선수 도전기, 전 시카고 주민 버락 오바마가 증언한 시카고 내의 조던 신드롬, "Welcome to the NBA"란 명언을 남긴 눈 감고 자유투 쏘기. 수많은 명장면들을 생생하게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고, 10부작, 514분을 관통하는 단어는 "경쟁심"이었다. 미친, 아니 병적인 수준의 경쟁심은 조던이 위기 상황에 더 강하게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상대의 도발은 반드시 갚아주는 엄청난 승부욕은 코트에서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었다. 조던은 덩치 큰 센터에게 블록을 당하면 반드시 인 유어 페이스를 성공시켰고, 떠오르는 신예는 악착같은 수비로 무득점으로 묶어버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시애틀 감독 조지 칼이 나이 든 조던이 몸을 사리는 점프 슈터란 인터뷰에 조던은 발끈해 점퍼만으로 39점을 넣어버리는 쪼잔함을 보여줬다. 심지어 적은 금액이 걸린 동료들과의 포커 게임, 구장 직원들과 동전 던지기 내기,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경쟁 선수와 골프 시합에서도 마이클 조던은 무조건 이겨야 직성이 풀렸다. 그는 어린 시절 형과 일대일을 할 때부터,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치열하게 부딪히는 NBA 선수 시절 내내 치열한 경쟁을 즐겼다. 왜냐하면 반드시 경쟁에서 이겼고, 승리의 달콤함을 깊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동기부여를 만들어내고, 스스로를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것은 조던의 독보적인 장점이었다. 물론 우승을 위해 본인뿐 아니라 팀 전체를 가혹할 정도로 몰아치는 제왕적 리더십을 보여줬다.


태생적으로 포기가 빠르고, 패배의 두려움이 큰 '적당 주의자' 나에게 조던은 다른 세계의 사람, 아니 악마 같았다. 승자독식구조에서 자라온 정상급 운동선수들까지 혀를 내두르는 게 조던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지독한 트래쉬 토크로 허둥대는 팀원을 다그치고, 나약한 멘털을 흔들며 똑바로 따라오지 못하는 이에게 패스를 주지 말라고 소리쳐버렸다. 하지만 이런 강한 압박은 단순한 괴롭힘이 아닌 승부욕을 이끌어내는 조던만의 방식이었다. 괴짜 악동 로드맨, 최고의 조력자 피펜도 이런 조던의 시험을 이겨내고 영광의 시대를 함께 한 동료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눈이 가던 건 평범한 슈터 '스티브 커'였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3회 우승을 이끈 명장으로 익숙한 스티브 커는 시카고에서 우승 반지를 3개나 얻어낸 당당한 일원이었다. 주목받지 못한 드래프트 50순위, 운동 능력이 부족한 191cm의 깡마른 백인 가드 커는 프로 데뷔 후 별 볼 일 없는 커리어였지만, 조던을 만나며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슈팅 능력 하나만은 진짜였고, 깡다구와 노력은 더욱 진심이었다. 훈련 도중 조던의 거친 몸싸움과 트래시 토크에 스티브 커는 지지 않고 맞받아쳤고 결국 주먹다짐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조던은 이후 전화로 사과하고 커의 승부욕과 투쟁심을 존중했다. 무려 가장 중요한 1996/97 파이널 샷을 백업 슈터 커에게 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NBA 역사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이름을 남긴 스티브 커 (출처 : ESPN)


유타 재즈와 시카고 불스는 종료 28초를 앞두고 86대 86으로 동점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조던이 공을 몰고 가자 황제의 버저비터를 막으려 두 명이 다급하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조던은 놀랍게도 공을 커에게 패스했고, 커는 깨끗한 궤적의 슛으로 우승을 확정 지었다. 스티브 커의 성공 신화는 '리더'가 되기엔 타고난 깜냥이 부족하지만, 꾸준한 노력이 장점이라 생각하는 나에게 제법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스티브 커는 묵묵히 자신의 장점인 슈팅을 죽도록 연습했고, 기회가 왔을 때 침착하게 성공시켰다. 물론 그의 성공에는 행운도 많이 따랐다. 운 좋게 이적한 시카고에는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백인 3점 슈터 팩슨이 있었고, 여러 장점을 빠르게 흡수했다. 또한 타고난 승부사 조던, 득점력이 뛰어난 피펜, 슈팅이 실패해도 리바운드를 따내 줄 로드맨이 든든하게 곁에 있었다. 자연스레 빈 공간을 파고들면 3점 기회가 많아졌고, 묵묵히 연습한 슈팅을 게임에서 펼칠 수 있었다. 자신의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미칠듯한 경쟁심을 바탕으로 노력한다면 반드시 기회는 오고,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결국 행운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고,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노력이 성공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란 걸 받아들이고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


조던의 살 떨리는 훈련을 보면 주변 동료들이 한때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가차 없는 인격 모독을 당하고, 원치 않는 연습을 꾸역꾸역 버텨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 경기보다 더 무서운 훈련을 버텨낸 그들 역시 빠르게 성장했으며, 영광의 순간을 영원히 함께 기억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보스와 리더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준 조던은 가장 맨 앞에서 맹렬하게 싸우고 마침내 이겼다. 내가 과연 조던처럼 타인을 다그치고 항상 일인자의 자리를 지켜내고 승리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객관적으로, 아니 주관적으로 매우 좋게 평가해도 나에게는 그만한 타고난 재능이 없다. 하지만 스티브 커처럼 명확히 내 위치를 파악하고, 언젠가 찾아올 '한방'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오'력할 자신은 있다. (그저 중요한 순간 터진 운 좋은 득점이라 폄하하기엔, 커의 통산 3점 슛 성공률은 45.4%로 NBA 역대 1위이다.) 타고난 DNA를 뜯어고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비관하고, 나의 환경을 탓하며 구시렁거리기엔 어차피 불공평한 세상은 빠르게 흘러간다. 그저 기회를 놓치지 않을 노력을 묵묵히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결정적 순간에 전달된 공을 늘 하던 대로 차분하게 림을 향해 던질 용기만 있다면 나도 당당히 '라스트 댄스'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조던이라면 맨 앞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뛰어가는 리더가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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