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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왕실의 별장 후아힌, 응급실 침대에 누웠다.

[도서] 여행의 이유, 김영하

by 샘바리
stomach, high fever but... cold. umm...
diarrhea and too hurt.
OK??
엄청난 시간을 헤엄칠줄 알았으나, 바라본 시간이 더 많았던 수영장.


태국 왕실의 별장 후아힌은 방콕에서 3시간 거리의 태국 휴양지다. 기가 막힌 수준의 자연 광경은 아니더라도 제법 아름다운 해변이 한적한 분위기를 뽐낸다. 초호화 리조트나 쇼핑몰은 없더라도 충분히 놀거리, 먹거리가 훌륭한 리조트, 쇼핑몰이 곳곳에 있다. 짧은 여름휴가 일정 탓에 머나먼 유럽, 휴양의 끝판왕 몰디브 등은 꿈꿀 수 없기에, 후아힌은 여러모로 최적의 선택이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석양이 아름다운 비치를 바라보는 수영장 등 여러모로 가성비가 좋은 뫼벤픽 아사라 리조트로 숙소를 결정했다. 아늑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와이너리 투어를 할 수 있다는 몬순 밸리 투어도 예약했다. 말로는 편하게 쉬다오자고 하지만, 성격상 워낙 꼼꼼하게 여행을 계획하는 우리 부부에게는 수많은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난생 첫 비즈니스 클래스에 탑승해 스테이크를 썰 때도, 온화한 미소로 우릴 맞이하는 리조트 직원을 맞이할 때도 몰랐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리조트에서 다 읽고 한국으로 돌아갈지. 그리고 낯선 외국에서 응급실을 찾아갈지.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 문학동네


작가 김영하의 유려한 화술과 날카로운 통찰은 tvn <알쓸신잡>, KBS <대화의 희열>을 통해 여러 번 접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조선인들의 멕시코 이주기를 다룬 소설 <검은 꽃>의 처절함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가벼운 느낌의 여행집은 또 색다른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일상을 벗어나 생생하고 색다른 경험을 갈망하는 인간, 낯설지만 아늑한 호텔이 주는 편안함의 이유 등은 대체로 정곡을 찌르더라. 그래서 급하게 공항에서 <여행의 이유>를 샀다. 해변가에 누워 맥주 한 캔을 벗 삼아 편하게 여행자이자 작가인 그의 여행기를 읽는 한량을 꿈꿨다. 중국 여행에 비자가 필요한지도 몰랐던 그가 급히 귀국하는 이야기인 '추방과 멀미'를 보고 사실 그를 비웃었다.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고, 글로 쓰기 좋은 소재를 얻었다고 합리화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깨진 거 아닌가? 하지만 이런 나의 오만하고 허영 된 생각은 '노바디의 여행'에서 소개하는 호메로스 <오디세이아>와 너무나 닮아있었다. 산토리니 파크, 마켓 빌리지, 렛츠 릴랙스 스파, 스트리트 푸드마켓.. 맛집, 카페, 명소, 체험으로 꽉 차 있는 여행 계획이 모두 틀어질 줄이야..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생각보다 먼 거리에 있던 약국. 척척 알아듣고 약을 꺼내줬다.


여행 둘째 날쯤 아내가 영 입맛이 없고, 계속 몸이 뻐근하다고 했다. 처음 온 동남아도 아니었고, 아내가 약으로 먹고사는 전문가기 때문에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장난을 치며 마사지나 받고 좀 쉬자, 배고파서 그런 거라고 웃어넘겼다. 그리스풍으로 꾸며놓은 산토리니 파크에서 마치 머나먼 유럽에 온듯한 기분을 내고 나서 돌아가는 길에 결국 일정을 수정했다. 더위를 먹었나 싶어서 리조트에서 쉬면서 좀 컨디션을 회복하기로 했다. 아내가 누워서 쉬는 동안 케이크를 먹으며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미지의 나라 중공에 가서 경찰과 친해져 나중에 큰 도움을 받은 스펙터클한 사건을 읽는 그때, 아내가 나를 불렀다. 상황이 나아지질 않아서, 결국 구글맵을 켜고 나는 나시티+슬리퍼 차림으로 약국으로 향했다. '스멕타, 노르플록사신, 부스코판'. 3가지 명약을 찾아 나선 심마니, 아니 남편은 저렴한 약 가격에 한번 더 놀라며 무사히 약을 사들고 갔다. 그나마 약을 먹고 진정이 되었는지 조금 낮잠을 자고 일어나 저녁엔 가볍게 쇼핑몰을 다녀왔다. 하지만 그건 후아힌 여행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통증은 더 심해지고, 계속 버티기 힘들어서 결국 가까운 응급실로 달려갔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정성스런 허니문 케이크와 친절한 응대에 감사합니다. 뫼벤픽 아사라 리조트!


자정 무렵 퇴근하려던 프런트 직원은 다급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며 택시를 부르고, 영어가 되는 병원 응급실을 알려줬다. 무사히 도착한 방콕 후아힌 병원은 밝게 불이 켜져 있었다. 도착해보니 몇 시간 전 더위에 지쳐 망고를 찾아 헤매던 쇼핑몰 바로 옆이더라.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더니만. 내가 접수를 하는 동안 간단한 체크를 마친 아내는 눈을 질끈 감고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개인 수영장이 내다보이는 푹신한 슈퍼킹 사이즈 배드에서 딱딱한 1인용, 하지만 높이 조절이 가능한 의료침대에 있다니! 떠듬떠듬 내가 아는 모든 병명과 관련된 영어 단어를 내뱉었다. 당직 근무가 일상인 듯 피곤에 지쳐 보이는 젊은 의사가 그래도 정성껏 진료를 이어갔다. 배를 꾹꾹 눌러보며 세심하게 여기저기 체크했다. "눌렀을 때 진통은 0~10 중 어느 정도? 평소에 복용하는 약은? 식욕은 있는지?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얼마나 증상이 지속되는지?". 중간중간 의사소통이 막히자 한국말을 조금 아는듯한 간호사가 옆에서 도움을 줬다. "지금 약 먹다?" 100% 소통이 되진 않았지만, 그저 진심으로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 마냥 고마웠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능력보다 더 높이 희망하며,
희망했던 것보다 못한 성취에도 어느 정도는 만족하며,
그 어떤 결과에서도 결국 뭔가 배우는 존재다.


기념품 아닌 기념품. 방콕 병원 약봉투.


다행히 수술이나 장기 입원이 필요한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No Appendicitis.' 의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주사와 처방을 내리고 진료를 마무리했다. 의사는 못 알아들은 나를 위해 구글 번역기를 써서 단어를 보여줬다. 충수염? 한글로 들어도 아리송한 병명에 다시 한번 검색을 통해 맹장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1시간 넘게 진정제를 다 맞고, 약을 처방받고 황송하게도 휠체어를 타고 택시를 타러 갔다. 그 이후의 여행 일정은 그저 휴식과 금식의 연속이었고, 얼른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리조트에 소문이 났는지 보는 직원마다 "Are you OK?"를 인사처럼 건넸다.) 그리고 3시간 반의 방콕행 시외버스, 3시간의 공항 대기, 8시간의 비행을 이겨내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완벽하게 준비한 여행은 '건강이 최고다'란 교훈을 남기고 와장창 어그러졌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남들이 다 가는 음식점, 남들이 가지 못할 명소를 찍고 오는 우리에겐 상상도 못 할 여행이었다. 최소한의 일정과 비용으로 최대한 많은 사진을 남기는 게 우리 여행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가장 컨디션이 좋았을 때 사진을 많이 찍은 곳, 산토리니 파크.


하지만 여행이 허무하게 끝나버렸지만 신기하게도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사랑하는 가족이 아파서 속상하고 슬픈 감정만 남았다. 진심으로 낯선 타인인 여행자를 걱정하고, 내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던 직원들을 향한 고마움이 남았다. 멀쩡한 컨디션이던 첫째 날 땀을 뻘뻘 흘리며 삼각대를 놓고 찍은 다정한 사진 몇 장은 건졌다. 무조건 해외를 나가야지만 지루하고 피곤한 일상이 리셋된다는 막연한 믿음이 사라지고, 매일 그 자리에 있던 좁은 집이 그리워졌다. 원치 않는 결과에 초연하고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추억을 빚어내는 법도 조금은 배웠다. 요약하자면 <여행의 이유> 글귀처럼 '집을 떠난 주인공, 우리 부부가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시간'이었다. 아, 그리고 절대 잊지 않을 고급(?) 영어 단어 'Appendicitis'도 배웠구나.


한편 다시는 야시장에서 정체 모를 얼음이 들어가는 차가운 주스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대신 아내의 불안한 뱃속을 걱정하며 조용히 부엌 한편에서 따뜻한 매실차를 타고 있다.

그렇게 아른거린다는 김밥을 주말에는 무사히 먹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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