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제주도 여행
제주도 가면 꼭 한라산 올라가자!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면서 '한라산 등반'은 꽤 높은 순위에 있었다. 편한 운동화도 챙기고, 초보자 등산 코스도 알아봤지만 이상하게도 백록담을 바라보는 풍경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한라산에 오르지 않았다. 한라산에 딱히 좋은 기억이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 애사심이 충만한 신입사원 수련회 때 초심을 잃지 말라는 의미로 쌀 한 줌을 가방에 넣고(?), 한라산에 올랐다. 동기들과 수다 떨면서 빠르게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길은 딱히 재밌지 않았다. 강제성이 있는 등산은 운동을 좋아하는 나에게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한라산에 오르지 않았다는 후회, 여행 TO DO 리스트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전혀 없었다. 알찬 계획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지만, 적어도 이번 여행만큼은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쉬고, 먹고, 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았고, 추천을 받은 맛집들은 기대 이상이었다. 호텔 수영장에서 늘어지게 햇빛을 내리쬐며 여유로움을 최대한 만끽했다. 전복물회, 고기국수, 꽃돼지 연탄구이, 오는정김밥, 애플망고 빙수. 많이도 먹고, 지겹도록 감귤 타르트를 까먹다가 자연스레 소화를 시킬 겸 걸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오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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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의 왕국 제주도에는 약 368개의 오름들이 존재한다. 전역에 널린 단성 화산들은 모양에 따라 말굽형, 원추형, 원형, 복합형 등으로 나뉘는데, 뭐가 뭔지 모르는 우린 그저 숙소에서 가까운 애월읍 '새별오름'을 택했다. 넓은 주차장에 렌터카를 편하게 주차하고, 안내표지판을 살펴봤다. '등반 소요시간 : 약 30분'이라는 안내는 우리의 취향에 딱 들어맞았다. '어느 정도 풍경을 감상하며 먹방으로 인한 배부름을 가시게 하지만, 절대 힘들면 안 된다.'는 기준에 정확히 일치하는 오름이었다. 물론 오르기 전 가볍게 땅콩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여행의 본질에 충실했다.
주 봉우리를 정점으로 북서쪽과 북동쪽에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서쪽 비탈은 넓게 휘돌아 벌어진 말굽형 화산구를 이루고 북쪽 비탈은 부드럽고 작게 벌어진 말굽형 화구를 이루는 오름이다. 서북쪽에서 보면 부드럽고 굽이치는 굽부리의 능선 윤곽이 뚜렷하다. 저녁 하늘의 샛별과 같이 외롭게 서있다 하여 새별오름이라 불러졌다고 한다. - 샛별오름 안내 표지판
천천히, 그리고 나란히 아내와 새별오름을 오르기 시작했다. 푸른 들판은 조금씩 가팔라지기 시작했고 풀린 신발끈을 질끈 다시 묶었다. 조금씩 높이 올라가며 펼쳐지는 풍경은 예술이었다. 초록빛으로 가득한 들판은 평화롭고 아늑해 보였으며, 중간중간 눈으로만 담기 아쉬운 순간은 카메라 렌즈로 담았다. 굳이 힘이 달리진 않았지만, 끌어주고 밀어주며 오르다 보니 어느덧 정상에 다다랐다. 해발 519.3m의 꼭대기는 아담했지만, 아름다웠다. 달콤한 땅콩 아이스크림을 팔던 푸드트럭은 콩알만 하게 보이고, 어느덧 눈 앞에는 자연만이 펼쳐졌다. 우거진 수풀, 반대편에는 아름다운 능선의 오름들이 가득했고, 6시가 넘어 일몰시간이 다가왔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자리를 잡고 아름답게 퍼지는 황금빛 색깔을 바라보는 시간은 꽤나 낭만적이었다.
탁 트인 들판과 붉게 물든 하늘은 제주 여행의 백미였다. 카메라가 그 느낌을 살리지 못해, 대신 두 눈으로 오래오래 담아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은 대로 보내는 시간은 진정한 여행의 묘미다. 딱 적당한 산책으로 허기 역시 적절한 수준이었고, 내려오는 길에는 무엇을 먹을지 깔깔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뭘 했는지 딱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상하게 만족스러운 제주도 여행이었다. 가야만 하는 핫스팟,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을 놓쳤다는 아쉬움보다는, 순간순간에 충실하며 최대한의 행복을 만끽했다는 뿌듯함만 가득했다. 여행은 빠듯한 일상에서 잠시 한 걸음 벗어나는 시간이다. 의무감에 쫓겨 눈 앞에 장관을 사진만 찍고, 후다닥 다음 행선지로 떠나는 건 그저 '일'의 연장선이다. 아무 생각 없이 함께 오름에 오르는 그 순간, 그 기쁨을 기억하며 다음 여행을 그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