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신혼일기
집안일은 안 하면 티가 많이 나고, 해도 티가 조금 난다. 어느덧 2년 반이 넘었지만 나는 집안일을 완벽하게 해낸 적이 거의 없다. 깔끔하게 집 정리한 걸 은근히 티 내고 싶어 하지만, 내 의도와는 다르게 실수한 구석이 오히려 티가 난다. 쟁반 모서리에 눌어붙은 치즈가 남아있거나, 음식물 쓰레기가 거름막에 살짝 넘치거나, 건조기에 넣어도 되는 빨래를 굳이 널어두거나, 헤어 드라이기 전선을 꼬아둔 채로 출근하거나. 치명적인 실수가 아니라고 그냥 넘어가도 되지만, 실수가 계속되면 그건 실력이다. 여전히 손이 느리고 꼼꼼하지 못한 편이라 뭔가 2% 부족하다. 태생적으로 집안일에 서툴다고 하기에는 결혼 전 아내도 요리, 청소를 거의 해본 적이 없기에 변명이 되지 않는다. 왜 둘만 사는 전용면적 13평 언저리를 완벽하게 책임지지 못할까?
우리는 2년 반 넘게 이 공간에서 살고 있다. 1993년 지어진 주공 아파트, 방 하나 거실 하나, 매달 갈아줘야 하는 녹물 필터, 곰팡이가 조금씩 천장에 번지는 베란다. 따박따박 나가는 월세가 매우 저렴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불편함을 떠안고 살고 있다. 미니멀 라이프와는 거리가 먼 우리는 오히려 공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잔머리만 늘었다. 다용도 옷걸이, 멀티 수납장 등을 활용해 차곡차곡 집을 채워 넣었고, 어느 정도 익숙해진 공간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고 있다. 나름 산이 가까이 있어서 공기도 좋고, 산책로도 잘 꾸려져 있고 여름에 시원하다고 합리화도 하고 있다.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건 명확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2021년 분양받은 '새집'으로 이사하리란 부푼 꿈이다. 열 평 넘게 넓어진 공간, 큰 쇼핑몰이 가까이 있는 인프라라면 싸울 일은 전혀 없을 거라 믿고 있다. 마치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1. 식기세척기
2. 정수기
3. 음식물 쓰레기 분쇄기
4. 물걸레 무선청소기
이사하면 사고 싶은 물건들을 하나씩 적어봤다. 음식물 쓰레기 악취에 얼굴 찡그릴 필요도 없고, 매번 생수 박스를 배달받아 낑낑 거리며 옮길 필요도 없고, 쟁반 어딘가에 붙어있을 고춧가루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지금 스트레스받는 일들이 조금만 더 돈을 들이면 전혀 걱정거리가 아니란 걸 아내와 공감했다. 돈으로 행복은 살 수 없어도, 적어도 최소한의 불행은 막을 수 있다고 느끼고 있다. 넉넉하고 깨끗한 공간에 보다 세련된, 편리한 기구들이 있다면 서로 탓할 일도, 머리 싸매고 고민할 일도 줄어드는 법이다. 매일매일 출근하고 버티는 삶이 꽤나 고통스럽지만, 명확한 목표를 함께 나누니 제법 버틸만하단 생각이 드는 하루다. 물론 이사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먼 미래 같지만 혹시 모를 아이가 생기면 공간이 좁을 수도 있고, 새로운 가구와 잡동사니를 채우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미래의 일을 걱정하지 말고, 눈 앞의 머리카락 한올을 먼저 치우자. 지금의 경험치가 쌓여서 언젠가는 능숙하게 집안일을 해내고 대수롭지 않아 하기를 바라며. 베란다로 보이는 맑은 하늘, 우거진 산비탈의 나무들이 오늘따라 유독 친근해 보인다.
+ 청소 도우미 서비스를 부르고, 진지하게 지켜볼까 생각했으나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는 이론을 모르는 게 아니라 실전에 약한 거다. 마무리에 더 신경 쓰면 되는 일이다.
++ 브런치에서 '집안일'을 키워드로 노하우들을 읽는 것도 쏠쏠하다. 나도 나만의 노하우가 쌓여 공유하는 수준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