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면 즐거운 사람들과 식사를 하던 저녁이었다. "공정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이는 이내 자녀 교육 문제로 이어졌다. 자칫 민감할 수도 있는 화제였지만 센스 있는 사람들 덕에 정제된 대화만 오갔다. 나는 그게 참 좋았다. 그래서 그 화두를 좀 더 붙잡고 싶었다. 하여 짧지만 며칠간 생각을 숙성한 뒤 여기에 풀기로 했다.언제나 그렇듯 개인적인 생각일 뿐임을 밝힌다.
1. 교육과 공정의 관계
교육에 공정함이 개입하는 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학생들이 넘어야 하는 과제가 동일해야 한다는 공정이다. 모든 수험생들이 같은 시험 문제를 풀어야 공정성에 문제가 없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하기 수월하다. 곡선코스를 포함한 육상경기에서 바깥쪽 레인으로 달릴수록 출발선이 앞에 위치한 것도 비슷한 예다. 이견이 별로 없을 측면의 공정이다.
교육과 공정이 연결되는 두 번째 고리는 이러한 과제를 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용한다. 문제집 살 돈도 없는 학생이 있는 반면에 전과목 과외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요즘엔 이런 현상을 일컬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듯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주로 문제가 되는 건 이 부분이다.
2. 논의의 전제
여기서 기울어진 운동장의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뚜렷한 답이 없거니와 내가 언급하기엔 너무 큰 담론이기 때문이다. 앞서 예로 든 두 학생을 생각해 보자.
가난한 학생에게 부유한 학생과 똑같은 선생님으로 전과목 과외를 시켜주는 게 공정일까? 아니면 부유한 학생의 과외를 차단하는 게 공정일까? 더 많은 학생을 고려하면 부의 수준 차가 더 큰 스펙트럼을 보일 텐데 그땐 어디를 기준으로 잡아야 공정한 것일까?
학생들의 지적 수준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체력이 다르고, 희망 직업이 다르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문제가 아니라 각 가정의 판단에 대해 집중한다.
즉, 운동장이 기울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되 그 운동장에서 뛸 선수(=학생, 자녀)와 감독(=부모)이 어떤 판단을 할지 고민해 볼 예정이다.
3. 부모의 판단
운동장을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을 일종의 성공값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성공을 이루는 요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을 수 있다. 이를테면 자산, 직업, 학력 등이 되겠다.
상기의 논의를 간단한 함수로 나타내면 아래처럼 된다.
성공 = {자산, 직업, 학력}
자녀 교육에 관한 부모의 판단은 "자녀 세대의 성공값이 최소한 내가 이뤄놓은 성공값보다 크거나 같도록" 하는 수준이 될 것이다. 즉 함숫값을 깎아 먹지 않게 하는 게 핵심이다.
예를 들어 연이자율이 1%인 사회에서 가용한 금융자산이 100억 인 부모가 외아들을 두고 있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그 사회에서 가게를 하나 차리는 데 2억, 외아들이 가게를 말아먹는데 2년이 든다면 어떻게 될까.
부모가 100억을 통장에 넣어두면 2년마다 모이는 이자가 2억이니 2년마다 2억짜리 가게를 폐업해도 원금 100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경우 그 자녀가 학력만 부모 이상을 일궈놓는다면 자산에 손실이 없는바 직업 (=가게 창업)에 큰 터치를 하지 않게 된다.
반대로, 부모가 모두 1등 대학을 나왔는데 자식의 성적이 2등 대학 수준에 그친다면 학력이라는 요소에서의 감점을 막기 위해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이 커질 수 있다. 2등 대학만 나와도 먹고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데도 말이다.
4. 자녀의 판단
자녀는 자신이 어떤 분야에서 강점을 가졌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 어느 영역이 자기에게 즐거움을 주는지 정도는 얘기할 정도가 돼야 부모의 함수값을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자기가 하고픈 걸 고르거나 주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업으로 자산을 크게 키울 자신이 있다면 그만큼 학력이나 직업 등이 조금 낮아지더라도 전체 성공값을 유지하거나 높일 수 있으니 부모를 설득할 수 있으리란 얘기다.
즉 자녀의 판단은 부모의 성공값이라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자유치를 찾기 위한 몸부림에 달렸다.
5. 결어 : 필요한 건 대화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부모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일궈놓은 성공값을 더 키우거나 최소한 유지해 주길 바란다. 그런 제약 하에서 자녀들은 자기가 최대한 즐거운 일을 고르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다.
이런 상황에서 윈윈이 되려면 부모 자식 간의 대화가 중요하다. 부모는 자녀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야 교육의 강도를 정할 수 있고, 자녀는 부모가 원하는 조건이 뭔지 알아야 자기가 누울 자리를 가늠할 수 있다.
어느 분야든 성공한 사람의 뒤에는 부모의 지원이 있다. 그러나 그 역은 항상 성립하지 않는다. 부모가 엄청난 지원을 퍼부어도 방향이나 방식이 잘못되면 자녀의 성공을 담보할 수 없다.
그 방향 설정 자체를 제대로 하고, 자녀도 자기의 적성을 올바로 파악하는 역량도 사실 부모의 성공값에 따라 이미 차이가 난다. 그러나 기울어진 운동장일지라도 어쨌거나 개인이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역시 대화임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