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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현경 Jul 08. 2023

캠퍼밴 여행의 묘미

뉴질랜드 캠퍼밴 여행기

와이토모 동굴 투어를 다녀왔다. 동굴에서 푸른색으로 빛나는 글로우웜의 무리를 볼 수 있다고 해서 뉴질랜드에 오기 전부터 기대했던 곳이다. 다만 발광하는 빛이 미약해서 직접 눈으로 볼 때는 장노출로 찍은 사진보다 드라마틱하지 않았다. 그래도 조용한 동굴에 보트가 뜬 가운데 글로우웜이 발하는 푸른빛이 어스름히 비치는 모습은 한 번쯤 볼만한 광경이었다. 로토루아에서 와이토모까지 두 시간, 또 와이토모에서 타우포까지 두 시간 이동했다. 


창고형 마트 팩앤세이브. 주유와 식료품 보급을 위해 수시로 드나들었다.


타우포는 북섬의 중앙에 위치한 아주 커다란 호수인데, 그 반경이 서울시 전체보다 크다고 한다. 실로 바다같이 드넓은 호수였다. 팩엔세이브 마트에 들러서 저녁에 먹을 맥주를 샀다. 다른 건 몰라도 맥주가 떨어지는 일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12캔짜리 한팩을 카트에 싣는다. 오늘은 무료 캠핑 사이트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뉴질랜드에는 유료 캠핑장뿐만 아니라 무료 캠핑장도 도처에 널려있다. 우리는 예산을 아끼며 여행하기 위해 유료 캠핑장과 무료 캠핑장을 번갈아가며 이용하기로 했다. 무료 캠핑장엔 대체로 샤워시설은 없고 이동식 화장실뿐이지만 화장실이 있는 것만 해도 어딘가! 그렇게 찾아간 곳은 히파파투아 보호구역. 캠프사이트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캠퍼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는 가운데 빈자리에 차를 세웠다. 사이트 아래에는 강이 흐르고 물살이 아주 세고 투명했다. 저녁이 다되어가는데도 여자 둘이 그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뉴질랜드에서는 강이나 호수에서 수영하는 일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수영복과 물안경이 있었다면 나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물이 투명하고 깊어 보였다.


좁지만 뭐든 만들어내는 캠퍼밴의 주방
캠퍼밴이 멈추면 그다음은 맥주를 꺼내는 일뿐이다.


오늘 저녁은 남편의 특제 카레. 소고기와 야채를 잔뜩 넣어서 볼륨감이 넘친다. 즉석에서 요리하고 바깥에 펼쳐놓은 피크닉 테이블이 곧 식탁이 된다. 이게 캠퍼밴 여행의 진정한 묘미다. 햇반 하나에 카레와 사이더 한 병을 다 마시고 나니 배도 부르고 취기도 올라와 금방 졸려왔다. 그때 옆자리에서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인 아저씨가 다가왔다. 종이팩에 담긴 히말라야 소금을 건네주며 자기가 필요한 양보다 많다며 필요하면 가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남편과 잠시 인사를 나누고 자리로 돌아갔는데 잘 보니 캠퍼밴 앞에 모닥불을 피워두고 레게 음악을 틀어놓았다. 남편은 그에게 우리가 갖고 있던 아몬드 두 봉지를 가져다줬다. 오로지 버번위스키만 마신다는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캠퍼밴 생활을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후커 폭포의 박력 넘치는 급류


눈을 떴는데 몸이 무겁다. 간밤에 비가 좀 내린 모양이었다. 오전 8시 반까지 누워서 뒹굴거리다가 일어나 어제 내려가본 강가 근처를 잠깐 산책하고 캠프 사이트를 떠났다. 첫 번째 목적지는 가까운 곳에 있는 후커 폭포. 폭포라기에는 강의 물살이 급류로 바뀌는 지점으로, 거대하게 쏟아지는 물의 스케일이 압도적이었으나 비가 오는 관계로 사진만 후다닥 찍고 금방 캠퍼밴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웰링턴 근처까지 남쪽으로 내려가는 일정뿐이다. 가득 채워 주유를 하고, 우리는 아침으로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나눠먹으며 에너지를 충전했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시야에 닿는 모든 곳에 뿌옇게 안개가 끼었다.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는 와이퍼를 바라보며 남쪽으로 달린다. 



중간에 한 번만 휴식하고 반나절을 달려서 웰링턴 인근의 어퍼 헛이라는 동네에 도착했다. 탑텐 홀리데이 파크는 정말 시설이 쾌적하다. 고작 하루 무료 캠프 사이트에서 잤을 뿐인데도 홀리데이 파크의 깨끗한 샤워실과 화장실에 감동하게 된다. 먼저 체크인을 하고 샤워부터 한 뒤에 삼일동안 밀린 빨랫감을 세탁했다. 맥주 두 캔을 비운 뒤 누워서 쉬는데 저녁 여섯 시가 다 되어감에도 한낮처럼 밝다. 바람은 시원하고 온종일 내리던 비는 그치고 해가 구름 너머로 얼굴을 내비친다. 여행의 묘미는 이렇게 한없이 게을러져도 된다는 점 아닐까. 오로지 내일 일만 걱정하면 되는, 오늘 먹을 저녁거리가 최대의 고민인 일상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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