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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현경 Dec 18. 2023

온더락 스몰토크

도쿄 게스트 하우스 라운지에서


엔은 게스트 하우스 1층의 바 테이블에 서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케이는 이제 막 바에서 위스키 한 잔을 주문한 참이었다. 케이는 일본에서 자축할 일이 있으면 늘 하쿠슈 12년을 찾았다. 그리고 오늘은 마침내 스스로를 격려하고 축하하기 적절한 날이었다. 위스키를 받아 들고 적당한 자리를 찾던 케이의 눈에 엔의 모습이 잡혔다. 타이를 메지 않은 느슨한 정장 차림에 머리숱이 적은, 나이를 정확히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케이보다 분명 10살은 더 많아 보였다. 배경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고 있지만 어딘지 어색해 보이는 게, 이런 공간이 익숙하지 않은 티가 온몸에서 풍겼다. 바의 다른 자리는 모두 둘셋씩 짝을 이룬 여행자들로 가득했고, 케이는 엔의 옆으로 가서 물었다.

“여기 자리 비었나요?” 엔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그럼요.”

케이는 엔의 맞은편 바 체어에 걸터앉았다. 하쿠슈 12년이 담긴 잔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코를 가까이 가져다 대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쿠슈 특유의 맵싸하고 상쾌한 향이 코끝에 내려앉았다. 케이는 그것이 혀에서 사라질 만큼 조금 들이킨 다음 만족스럽게 웃었다. 케이와 엔은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서로에게 말을 걸지 서로 말없이 게임을 시작한 것 같았다. 서로 손에 든 잔의 내용물이 조금 사라졌을 때, 마침내 엔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건 위스키인가요?”

“네, 좋은 일이 있으면 꼭 이걸 마시고 싶어 져요. 하쿠슈 12년이에요.”

“좋은 술이죠. 저는 주머니 사정이 얇아서 자주는 못 마시지만요.” 엔이 멋쩍게 웃었다.

“저도 평소에는 가쿠*만 마셔요.” 케이가 말했다.

“가쿠! 제대로 아시네요.” 엔은 조금 긴장이 풀렸는지 몸을 테이블 앞으로 가까이 당겼다.

“저는 케이에요. 그쪽은 이름을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아, 저는 엔이라고 합니다.”

“엔씨.” 케이는 나지막이 웃으며 이름을 다시 불러보았다. “이곳엔 처음 오셨나요?” 케이가 물었다.

“네, 처음입니다. 오늘은 근처의 비즈니스호텔에서 묵는데 근처에서 마실 곳을 찾다 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저는 처음으로 친구와 일본을, 난생처음으로 해외여행을 스스로 계획해서 왔을 때 묵었던 곳이 여기 게스트 하우스였어요. 그러니까, 딱 10년 만이네요.”

“그렇습니까. 어떤가요, 여기는?”

“좋아요. 아마 여기가 도쿄에서 여행자들에게 가장 유명한 게스트하우스 일걸요?”

“게스트 하우스는 젊었을 적에 해외에서 몇 번인가 묵어본 적은 있지만…” 엔이 말끝을 흐렸다.

“일본 분이니까, 자기가 사는 동네 근처에서는 묵을 일이 잘 없죠.”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도쿄 사람은 아니고, 이바라키현 출신입니다. 이바라키 아십니까?”

“아마 도쿄의 북쪽이었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케이는 그의 겸양어 표현이 낯설지만 기분 좋게 들렸다. 초면의 상대방을 존중하는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지는, 특유의 몸에 밴 정중함이 좋았다.

“그런데 여기는 선곡이 참 좋네요.” 엔이 말했다.

“그러게요, 지금 나오는 이 곡도… 제목도 가수도 기억나지 않는데 귀에는 엄청 익숙하네요. 뭐였더라… 아,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맞네요, 레드 핫. 상당히 예전 곡들 위주로 나오네요.”

“음악 좋아하세요?”

“네, 요즘은 거의 재즈 위주로 듣지만요.”

“재즈 좋죠. 예전에 거래처 분에게 들었던 말이, 젊었을 적에는 록 음악처럼 시끄러운 것들만 듣다가 나이 들면 재즈나 블루스 같은 음악이 좋아진다고.”

그 말에 엔은 파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랑은 전혀 관계없지만, 저는 원래 예술 계열을 전공했어요. 사진은 지금도 취미로 찍고 있고요.” 케이는 어깨에 맨 슬링백에서 자동 필름 카메라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엔은 신기한 물건을 본 것처럼, 그러나 새롭지는 않다는 듯 슬쩍 눈웃음으로만 대답했다.

“그런데 필름 말입니다. 디지털이랑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요즘은 사진이 너무 흔하잖아요. 아이폰으로 툭툭 찍으면 그만이고. 필름은 촬영할 수 있는 장수도 제한적이고 고유한 색감이 있어서 사람들이 다시 찾는 것 같아요.”

“그런가요. 공학을 전공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파장으로 생각하면 그 메커니즘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이 들어서.”

“아, 그건가요. 어차피 필름을 현상해도 요즘은 거의 모니터로 보니까.”

“그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엔과 케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동시에 웃었다.

위스키가 담겨있던 잔이 비었을 무렵, 케이는 엔과의 적당한 대화도 슬슬 소재가 떨어져 가고 있다고 느꼈다. 케이는 피곤하기도 하여 그만 자리를 뜰까 하다가 한 잔만 더 마시자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잔 더 부탁할까 봐요.” “다녀오세요.”

바 메뉴판을 한 장씩 넘겨보다가 흥미로운 단어가 눈에 밟혔다. 산초 진 토닉. 산초… 그 산초? “여기 산초 진 토닉이라는 건, 산초를 인퓨징 한 건가요?” “네, 진에 산초를 넣어서 향을 입힌 것으로 만든 진 토닉입니다.” 바텐더가 말했다.

케이는 메뉴판에 적힌 글자를 흥미롭게 읽어보다가 말했다. “이걸로 주세요.”

다시 엔의 테이블로 돌아온 케이의 손에 들린 잔을 보고 엔이 물었다.  “이번에 그건 뭔가요?” “산초 진 토닉이라는데요.”

“허? 신기한 걸 하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케이는 금속 바 스틱으로 진 토닉을 휘휘 젓다가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아까 필름 얘기에 이어서, 레트로라는 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옛날 물건이 새로운 법이거든요. 한국에서는 몇 해 전부터 LP가 다시 유행을 하고 있어요. 레코드 같은 것도, 엔씨는 익숙할 테지만 저나 저보다 어린 친구들한테는 직접 손대본 적 없는 물건이거든요.”

“그렇습니까. 레코드도 그 음의 파장이라는 게 선형이냐 점으로 끊어지느냐 출력의 차이일 뿐인데요.”

“엔지니어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군요.” 케이는 진 토닉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래도 그런 아날로그의 매력이라는 게, 결국 얼마나 손이 가느냐, 번거로움에서 오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해요. LP도 판을 직접 골라서 턴테이블에 놓고, 음악을 하나씩 고른다는 감각이 있거든요. 요즘처럼 스마트폰으로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다 들을 수 있는 세상에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이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지는 거죠.”

엔은 로즈마리가 든 칵테일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듣다가 짐짓 놀란 눈치였다. 같은 사물과 현상을 보더라도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해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멀게 느끼고 있었다.

“케이씨는 재미있네요.”

“그런가요? 지금 취해서 제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내일 아침이면 기억도 못할 텐데요.”

“하하, 그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이것만 마시고 일어나야겠어요. 내일 아침부터 집에 돌아가야 하거든요.”

“혹시 라인 교환 할 수 있습니까? 일본에 있는 동안에는 괜히 연락하지 않을 테니까요. 정말로 대화가 즐거워서 나중에 다시 일본에 오시게 되면, 다시 이야기하고 싶네요.”

“그러죠, 어려울 거 없으니까. 여기요.” 케이는 엔에게 스마트폰으로 라인 아이디를 건네주었다.

‘오늘 만나 뵙게 되어서 기뻤습니다!’

그는 케이에게 짧은 인사말을 남겼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연이 있다면 언젠가 다시.”

“네, 안녕히 주무세요.”

케이는 그에게 다시 연락하지 않을 것이 거의 자명했다. 여행의 순간에 마주치는 짧은 대화는 그 순간에만 유효하다는 걸, 그러나 케이의 마지막 말처럼 언젠가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므로. 케이는 방으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의 4층 버튼을 누르며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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