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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isBoucher May 30. 2017

파리를 파리로 만든 사람, 유젠 오스만 - 2/3

유젠 오스만 시장, 파리를 파리로 만들다

1853년 6월 23일, 죠르주 유젠 오스만이 드디어 파리 시장에 취임했습니다. 1편을 읽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19세기 중반, 오스만이 갓 파리의 수장이 된 시절의 파리 상황을 간단히 요약해보겠습니다. 

19세기 초반의 파리는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특히 도시 환경문제는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몇 번의 혁명과 몇 번의 쿠데타 끝에 나폴레옹 3세가 제 2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상황이었고, 도시는 그동안 마구잡이로 건설이 이루어지고 잘 컨트롤이 되지 않아 그 자체로도 난잡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산업혁명이 일어나 파리의 인구는 줄기는커녕 오히려 급격한 속도로 팽창을 하기 시작했고 건물들은 더 빠르게 지어지며 곳곳에 빈민촌이 생겼습니다. 이런 건물들은 상하수도와 같은 기본적인 인프라가 깔려있지 않은 상태에서 지어졌고,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들도 도시의 기본 시설, 특히 하수도(당시에는 전기와 가스가 아직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유일한 설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설이 구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로 곳곳에 오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도로라는 것들도 왕가의 시설들과 프랑스의 몇몇 주요 시설을 잇는 것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매우 좁고 어둡고 꼬불꼬불 멋데로 휘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걸어 다니 기조차 을씨년스러운 상태인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파리 19세기 초의 전형적인 길의 모습입니다.  작가미상의 사진.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수장이 된 유젠 오스만은 다양한 도시정책을 통해서 불과 십여 년 만에 파리를 전 세계가 주목하는 최첨단의 도시로 탈바꿈시킵니다. 그리고 오스만의 파리는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며 전 세계인들에게 그 매력을 뽐내고 있죠. 자, 그렇다면 오스만은 어떤 마법을 부린 것일까요?



오스만의 길뚫기와 도로정비


사실 오스만의 도시계획 프로젝트들이 전부 오스만의 공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무리이긴 합니다. 19세기 중반 파리의 가장 큰 문제는,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음습한 길들 그 자체였습니다. 큰 기념비적 건축 같은 전시성 사업은 둘째의 문제였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제시된 방법이 바로 길뚫기 사업입니다. 마구잡이로 지어진 건물들을 부수고 넓고 곧은길을 만드는 사업이었죠. 그리고 이 사업은 나폴레옹 3세가 황제가 되기 전,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즉 오스만 파리를 이해하는 첫 시작점인 길뚫기 사업의 시작은 오스만이 아닌 나폴레옹 3세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에 직접 오르기 전에 이미 시작한 사업이었다는 거죠. 나폴레옹 3세는 이런 아이디어를 런던을 체류하며 얻었다고 합니다.

그 이외의 오스만 치하에서 이루어진 많은 사업들은 그 당시 이름을 널리 떨친 다양한 건축가와 토목 공학자들의 아이디어와 이미 19세기 초반부터 존재했던 건축 요소들을 모아서 잘 정리한 결과물입니다. 세상천지에 새로운 창조물은 없죠. 하지만 오스만의 대단한 점은 건축가나 도시 계획가가 아닌 정치인의 입장에서 이런 다양한 아이디어들의 본질을 파악하고 필요한 부분에 적절한 예산을 배치해 실제로 파리의 도심미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것이겠죠.

오스만 시절 파리에 벌어진 가장 중요한 사업들을 나열해보자면 '길뚫기', '블록 만들기', '일반 건축물', '대형 공공건물', '나무 심기 및 공원 조성', '도시 시설(혹은 가구)', 그리고 수도관 사업 정도입니다. 이 중 수도관 사업은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고 나머지에 대해서 설명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리스트만 봐도 이 시절의 파리에 얼마나 많은 공사들이 있었는지 아실 수 있겠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파리 미화 사업'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설계하고 건설했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다양한 요소의 조율을 통해 파리의 현대화를 이루어낸 것이 오스만의 진정한 공적이라 할 수 있겠죠.

이번 편에서는 일단 이 중에서 도로와 관련된 부분들을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는 각각의 사업들이 합쳐져서 어떤 시너지 효과를 냈길래 파리가 그렇게 유명해졌는지는 다음 편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죠.


오스만 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들여다봐야 할 첫 번째 사업은, 이미 이야기했듯이 '길뚫기'입니다. 길을 뚫는다는 말은 우리도 가끔 쓰죠. 하지만 터널을 뚫는다라는 표현과는 좀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진짜 무언가를 뚫는 다기보다는 길이 없었던 동네에 길을 새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죠. '경부고속도로를 뚫는다'라는 말은 사실 서울과 부산 사이에 고속도로를 새로 만들었다는 의미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물리적으로 뚫는 행위를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오스만 파리에서는 '길뚫기'가 그냥 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정말로 실존하고 있는 건물들을 부숴가며 빈 공간을 만들어 터널처럼 길을 뚫는 것입니다. 길을 뚫기 위해서 길이 지나갈 예정인 자리에 걸쳐있는 건물들을 시가 매입하고, 그 건물들을 부수고, 길을 만들고, 남은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올리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일이죠. 


1887년 그려진 파리시의 도로정비용 수용 지도. 
 자세히 보시면 진한 검은 선이 지나가는 곳이 새로 뚫리는 도로입니다. 그리고 색깔이 칠해져 있는 것들 - 진한 것은 건물, 옅은 것은 중앙정원, 붉은 숫자는 필지의 번호입니다 - 모두 파리시가 구입해서 해체 후 재정비, 재건축해야 하는 구역입니다. 이 도면의 길이 한 500 미터 정도 길이가 될 것 같습니다. 출처:링크


아마도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을 부분은, 오늘날의 대부분의 도시건축 사업에서도 그러하듯이, 지어져 있는 건물과 그 땅을 매입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오스만과 그의 도시 건축 설계팀은 집권 6년 만에 8개의 대로와 수십 개의 작은 도로들을 뚫었습니다. 해체할 건물과 그 땅의 가격산정과 건물 매입을 포함한 모든 공사 과정을 통틀어서 6년입니다. 지금 하려면 아마 작은 도로 하나 뚫는데도, 매입이 아닌 설계과정에만도 최소 3-5년은 걸릴 프로젝트입니다. 완공은...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건물을 부수고 땅을 매입해 길을 뚫는 공사가 가능한 마지막 시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2차 대전 때 폭격을 맞아 도시가 통째로 지워진 유럽 도시들도 이런 식으로 길과 필지의 모양을 바꾸는 작업은 거의 못했습니다. 땅주인들이 그 상황에서도 정부에 땅을 팔지 않았기 때문이죠.

오스만이 이런 엄청난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도 나폴레옹 3세 황제의 힘을 등에 업었다는 것과 그 당시의 도로 상황이 워낙 개떡 같았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겁니다. 파리의 심각한 도시환경은 이런 도시 미화 사업에 힘을 실어줬고, 파리라는 도시는 황제가 살고 황제가 직접 관리하는 도시였으며, 도시의 재정도 도시 자체 재정뿐 아니라 프랑스 국가재정이 추가되어 편성되고 있었습니다. 오스만은 이 과정에서 시의 재정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다고 하는데 이건 너무 복잡한 이야기니 다음 글에서 아주 살짝만 다뤄보겠습니다. 어쨌건 오스만이 도시에서 돈 굴러가는 것을 컨트롤하는 방면의 귀재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이 과정에서 생긴 것이 바로 '대로'들입니다. 아비뉴 Avenue나 불르바르 Boulevard 라고 불리는 길들이죠. 전 세계의 이목을 주목시키는 화려한 상점들과 다양한 이벤트들이 항상 열리는 샹젤리제 거리, 루브르 박물관과 파리 오페라를 직선으로 잇는 오페라 대로 같은 유명한 길들이 오스만의 정책에 의해 태어난 도로들입니다. 이런 대로들은 파리 도로 시스템의 중추 역할을 합니다. 파리를 거닐며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파리의 도로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금방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파리는 수십 개의 대로들이 도시 곳곳을 지나가며 서로 만나고, 또 그대로들 사이로 작은 길들이 틈틈이 나서 그들이 다시 대로들을 수십 군데에서 만나는 형태입니다. 이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대로를 어떻게 구성하느냐 이죠. 파리에 수세기, 멀게는 십 수세기 전부터 존재하던 몇몇 큰길들에서 시작해 파리 곳곳에 대로가 닿게 하는 것이 오스만의 첫 목표였습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작은 길들도 같이 정비했죠. 


가르니에 오페라 북단의 여러 대로들이 만나는 구역
이 3D 지도에서 넓은 길들이 모두 오스만 시대에 만들어진 대로입니다. 4개의 대로들이 여러 지점에서 만나는 것이 보이시나요?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작은 길들이 매우고 있습니다. 출처 : Apple plans


위 3D 사진의 평면버젼 입니다.
해당 지역의 평면지도입니다. 하얀 선이 좀 넓은 부분이 대로이고 그 사이로 모세혈관처럼 퍼져있는 길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보시면 지하철역과 노선(녹색, 연보라색, 분홍색 등의 선들)이 이 대로들을 그대로 통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 Apple plans


오스만 파리에서 이런 대로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오스만 파리의 시작과 끝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 이 대로들과 길들입니다. 이 대로들은 지금은 자동차, 당시에는 마차가 지나가는 역할만을 하는 차로가 아닙니다. 하나의 대로는 기본적으로 차도, 인도, 그리고 수로의 역할을 동시에 합니다. 수로라 하면 지하에 있는 하수도죠. 오스만은 대로를 만들면서 동시에 이 길 지하에 수도시설을 깔아서 파리 시민들의 염원이던 상하수도 시설을 각 건물에 연결하는 데 성공합니다. 더 이상 오물이 길에 버려지는 일이 없게 된 것이죠. 그리고 오스만 이후 19세기 말이 대로들은 다시 지하철을 까는데 이용됩니다. 오늘날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에 이 대로들을 따라서 선로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도로 하나로 도시의 가장 중요한 대부분의 인프라 네트워크를 해결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도시기반설비 Infrastructure로서의 도로, 대로들은 우리에겐 그리 와 닿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업은 '도시 미화 사업'이라고 이름 붙여졌고, 전 세계에 파리가 이름난 것도 그 아름다움 때문이지 이런 설비의 문제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도시미관의 부분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대로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겉으로의 아름다음뿐 아니라, 도시 시스템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파리의 길의 가치


파리는 어떻게 파리가 되었을까요? 이 질문을 다시 던질 때가 되었습니다. 1866년 뉴욕 시장선거에서 외쳐졌던 캠페인 중 하나가 '뉴욕을 파리처럼 만들자'였습니다. 오스만이 대로 뚫기의 첫 번째 사업들을 완공한 지 채 4-5년도 안됬을 때입니다. 파리를 방문한 뉴욕 사람들이 오늘날 맨해튼 남쪽을 점유하고 있던 뉴욕에서의 삶과 파리의 그것을 비교하며 오스만의 파리를 배우자는 여론이 생긴 것이었죠. 시장으로서의 오스만이 그만큼 매력적이기도 했을 거고요.

이 당시 뉴욕 사람들이 파리에 여행 와서 가장 놀랐던 점이 바로 이 길들의 퀄리티입니다. 일단 도보와 차도가 확실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차도는 파리 근처에서 캐온 돌들로 만들어서 편편하고 관리하기 쉽고, 무엇보다도 흙먼지가 날리지 않습니다. 도보와 차도의 넓이를 합한 것이 길 하나의 넓이인데, 이것이 당시 다른 도시들의 그것과 비교해서 훨씬 넓습니다. 그래서 해도 잘 들어오고 보도의 넓이도 확보할 수 있죠. 이 도로들 중 특히 대로의 보도에는 가로수가 일렬종대로 늘어서 있습니다. 파리의 녹화 사업은 나폴레옹 3세가 보고 온 런던의 도시 속 공원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길에 가로수를 심은 것은 오스만의 특징적인 사업입니다. 오스만은 재임기간 동안 파리에 무려 8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가로수길의 출현입니다.


가르니에 오페라 근처 이탈리아인들의 대로 Boulevard des Italiens를 그려 이용한 엽서
오스만 시절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대로의 모습입니다. 요즘 같은 더운 날씨에 이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가로수의 그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림 출처 : 링크


가로수 이야기가 나왔으니 불어로는 모빌리에 유르반 Mobilier urbain (street furniture)라고 부르는 가로 시설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오스만은 이 대로들에 놓일 다양한 시설물들을 하나의 스타일로 통일하고 파리 전역에 설치합니다. 예를 들어 루브르 궁전 근처의 벤치가 룩상부르크 공원 옆에 있는 벤치와 똑같은 모양을 하게 한 것입니다. 파리 곳곳에 퍼져있는 가로등이 모두 거의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스만이 펼친 다양한 정책들의 방향, 즉 파리 어느 곳을 가도 파리임을 느끼게 하는 '통일성'의 한 부분입니다. 이런 시설물들은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벤치, 가로수 나무틀, 도보와 도로를 구분하는 난간, 신문 가판대, 광고판, 가로등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도로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시설물들이 일관성을 갖고 설치됩니다. 이런 일관성의 전통은 오늘날의 파리에서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지하철 출구 디자인, 버스 정류소, 쓰레기통 같은 것들이 새로 디자인되면 그 디자인 그대로 파리 전역에 설치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시설들의 일관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것들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왜냐면 이 모빌리에 유르반들중 대부분의 것들이 오스만 파리에서 세계 최초로 설계돼서 설치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오스만 이전에는 세계 어디에서도 이런 가로시설 그 자체를 찾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로등 같은 것은 파리를 빛의 도시 La ville lumineuse로 불리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파리 이전의 도시의 길들은 밤이 되면 모두 달빛을 벗 삼아 걸어 다니는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런 길들은 당연히 범죄의 위험이 높았고 사람들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밤거리를 무서워했죠. 단순히 어둡기만 길이 아니라 좁고 음습한 길인데 불빛 하나 없는 길들의 공포란... 서울에서도 최근까지 몇몇 골목길에선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밤의 보도의 범죄와 공포를 해결해 준 것이 바로 가스를 이용한(물론 지금은 전기를 이용합니다.) 가로등이었습니다. 건물이 몇 층씩 올라가면서 달빛조차도 희미해진 무서운 밤거리를 걸을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시설이죠. 보도에 중점을 줘 넓어진 보행공간은 다시 이런 다양한 가로 시설로 채워졌습니다. 오늘날까지 디자인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너무나도 잘 사용되고 있는 시설들입니다. 




왼쪽부터 광고판, 신문 가판대, 가로등입니다. 파리에서 많이 보셨을, 그 시절 디자인 거의 그대로 쓰이고 있는 가로 시설들입니다. 사진출처 : 광고판 : Tcherome 위키피디아 프랑스 / 신문 가판대 : L'indépendant du 4e 링크 / 가로등 : ParisBoucher

도로와 분리되고 다양한 시설을 통해 순식간에 편리해지기 까지 한 파리의 길들은 그 즉시 다양한 새로운 문화를 낳습니다. 세계 최초의 테라스 카페가 생기는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그 이전에는 실외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한다는 것은 거대한 정원을 소유하고 있는 귀족계층이 아니면 꿈꾸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파리의 도로에서는, 차가 옆에 지나가던 말던, 가로수 그늘이나 카페 파사드에 걸쳐진 차양막 밑에서 도시의 바람을 만끽하며 수다를 떨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센세이셔널 한 공간입니다. 

도보들이 정비가 되면서 보행자의 권리와 자유가 중요해집니다. 이 당시에도 도로변 건물 1층에는 많은 상점들이 있었는데요, 이전에는 도로의 일부분을 점유해서 장사를 했습니다. 아직 유리가 대량생산되기 전이라 도로에서 상점 안쪽을 볼 수 있게 하려면 가게 전면 일부가 열려있어야 했고, 그 개방구를 상점들이 전시공간으로 이용한 거죠. 하지만 유리가 발명되고, 상점들의 보도 점유가 금지되면서 이 상점들에 바로 쇼윈도 Devanture 라는 것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여유롭게 걸으면서 상품들을 둘러보기가 좋아진 것입니다. 본격적인 아이쇼핑의 시작입니다. 

보행자 편의라는 것이 생겼을 때 만들어진 문화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삶에도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들의 발생지가 바로 파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도시를 오늘날까지도 동경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파리는 그 문화의 시작점인 동시에, 보행자 편의에 중점을 둔 도로가 전 도시에 곳곳이 퍼져있는 세계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은, 아까 이야기한 '통일성'의 파리의 힘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서울에서는 신사동 가로수길이나 연남동 길등 일부 지역을 위주로 조성되고 있는 보행자 편의 도로가 오스만의 파리에는 도시 전체를 아우르게 된 것입니다. 오스만 집권 당시와 오스만 이후 그의 영향력 하에서 건설된 도로와 건축의 양은 현재 파리에서도 절대적입니다. 정확한 수치를 제시할 순 없지만 대로들은 거의 대부분 이 시대에 지어진 것이고, 건물들도 반 이상이 오스만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가르니에 오페라 앞 카페 드 라 페 Café de la paix 의 홈페이지
카페 드 라 페는 아마도 테라스 카페를 설명하기에 가장 좋은,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카페일 것입니다. 굉장히 많은 화가들이 그리기도 한 장소이죠. 


저는 한국의 도시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도보의 가치에 대한 재정립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의 길들은 이름난 가로수 길들 몇몇과 초대형의 대로들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인도와 차도가 구분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파리와는 비교하기 힘든 거대한 도시기 때문에 고속도로들이 도시 내부를 관통하고, 엄청난 규모들의 인간적이지 않은 대로들이 즐비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매일같이 걸어 다니는 도보가 구비되어 있는 도로들의 보행자 편의성은 여전히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박원순 시장하에서 시작되었었던 걷기 좋은 도시산업은 서울에 필요한 아주 중요한 가치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가 아시다시피 서울 주택가의 길들을 걷기란 그렇게 즐거운 일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도로와 보도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고, 벤치나 쓰레기통 같은 부대시설은 태부족합니다.

게다가 행정가들은 도보의 가치라는 것이 보행자에만 포커싱을 하면 해결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보행자 전용도로의 설치가 바로 그런 행정편의주의 정책의 전형입니다. 파리의 경우를 보면 보행자 전용도로보다 오히려 보행자와 자동차가 공유할 수 있는 도로가 도시 곳곳을 연결하기에 수월하고, 자동차가 느리게 가는 구간에서 상업활동이 오히려 활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대한 쇼핑몰이나 명동 같은 도보 위주의 상업공간은 우리 생활에 직접적으로 밀착되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바로 근처에 다양한 활동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작은 도로들이 좋은 보도와 함께 있는 것이 도시공간을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도로정비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만들어내는 결과물입니다. 그냥 도로가 필요하다고 넓히거나, 보행자가 많으니 보행자 구역을 설치하자는 방식으로 추진되서는 곤란합니다. 오스만 시절의 도로 프로젝트들은 이 점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교본입니다. 건물의 높이에 따른 적절한 도로의 넓이, 보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섬세한 방법들, 보행자는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사용자라는 인식에서 나오는, 필요에 의해 설치된 다양한 가로 시설들과 그 가로 시설 디자인의 아름다움과 통일성.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오늘날의 파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보도를 걸을 때도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부족한지 여기에 비추어서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2016년 여름 산책중 찍은, 너무나도 정겨운 쌍문동의 한 수퍼입니다.
이 가게가 외부와 소통하는 방식, 노란 선에 걸쳐있는 테이블, 약간 기울어진 자판기, 전 서울의 이런 풍경을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보행자의 편의성 면에서는 정말 발전해야 할 여지가 많은 풍경이기도 합니다. 아무렇게나 서있는 전신주나 갑자기 사라지는 보도블록, 정리되어있지 않은 채 방치되어있는 쓰레기 등등, 함께 고민하고 투자해야 할 부분입니다. 사진출처 : ParisBoucher


혹시 파리에 계시거나 곧 파리를 여행하실 예정이라면 파리의 대로와 작은 길들이 도시인의 삶과 얼마나 직접적으로 연결돼있는지 유심히 관찰해 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파리를 전 세계의 문화 수도로 만든 그 도시 문화가 바로 오스만 시대에 만들어진 도로들의 걷기 편함 Marchabilité 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그 도시에 '걷기'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부터에서야 드디어 테라스 카페가 생겼고, 보도에 있는 신문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다가 테라스에서 읽으면서 동료 친구들과 토론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도시를 산책한다는 개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런 역사를 연 도시 이서일까요? 오스만 시대에 형성된 조형언어 그대로 이어져서 만들어지고 있는 건축물들과 보도 설비들 덕분인지, 파리는 여전히 세계에서 손꼽히는 걷기 좋은 도시입니다. 특히 세계적으로 이름난 대도시들 사이에서는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 도보의 편의성, 도로 시스템의 구성 등으로 비추어 봤을 때 도보를 하나의 교통수단으로 채용할 수 있을 만큼 걷기가 좋은 도시라는군요. 이렇게 쓰고 있지만 저도 실제로 파리에서 걷는 것이 매우 즐겁고 지하철 몇 정거장 거리는 도보로 다닙니다. 일단 자동차 걱정 없이 걸을 수 있고,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의 1층을 점유하고 있는 다양한 상점들의 쇼윈도를 구경하면서 걷는 것도 좋고, 쓰레기통이나 가로수, 벤치 같은 다양한 편의시설이 있는 것도 좋고요. 


하지만 이런 도보의 편의성을 다른 도시에 그대로 갖다가 쓰기에는 무리도 있고, 아마 그 편의성은 구현이 돼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걸어 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의 도시들에서는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음 글에서는 파리의 건축물들과 도시의 상관관계를 다루면서 그 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파리를 전 세계에 알린 19세기 도로 건축의 센세이션을 이야기했다면 다음 주에는 왜 오스만 파리의 건축물들을 사람들이 여전히 주목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죠. 그럼 다음 글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커버 그림 : Paris Kiosk / 작가 : 장 베로 Jean Béraud, 1880-1884 작. 미국 볼티모어 소재 Walters Art Museum 소장 중. 작품 링크


P.S. 참고로 저의 브런치 블로그는 꽤 자주 두세 편의 글들이 모여 하나의 주제를 다루는 형식을 이룰 것입니다. 하지만 웬만하면 각 편을 독립적으로 읽으셔도 큰 무리가 없도록 소주제별로 분량과 메시지를 컨트롤을 할 예정이니 꼭 한 글타래의 연재분을 완독 하실 필요는 없고 소주제를 보시고 관심이 가는 편만 읽으셔도 문제가 없음을 밝혀둡니다. 물론 한 주제에 대한 연재분을 모두 읽으시는 게 저로서는 가장 감사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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