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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isBoucher Jun 06. 2017

파리를 파리로 만든 사람, 유젠 오스만 - 3/3

파리의 건축, 문화가 되다.

오스만이 파리에 해놓은 일을 분석하는 글을 3편 만에 마무리한다는 것은 정말 아쉬운 일입니다. 그와 그의 후임들이 남겨놓은 유산은 긍정 적으로던 부정 적으로던 너무나도 많고 그들의 영향력은 파리에 한정되지 않고 전 세계 대도시들 곳곳에 퍼져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파리 19세기 얘기만 주야장천 하기엔 조금 지겹기도 하므로 오스만 이야기는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오스만, 그리고 오스만 이후 그의 사상을 따랐던 사람들이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에 만들어 놓은 파리에는 단점과 그에 대한 비판도 많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단점은 다루지 거의 다루지 않았지만 그의 강력한 건축과 도시 정책 및 규제들은 오늘날의 파리 시가 발전하는 데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어떤 정치적 제도적 영향뿐 아니라 그 건축과 도시가 만든 문화적 영향일 가능성이 큽니다.

지난 시간에는 오스만 파리가 세계에 널리 떨친 가장 강력한 문화적 영향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도시의 도보화'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편리하고 아름다워진 보도가 파리 시민들에게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때 즈음부터 사람이 도시를 걸어 다니면서 꽃 피워 나는 다양한 문화들 - 테라스 카페나 아이쇼핑 같은 것이 오스만 파리의 도보환경 개선의 결과물이라는 것이었죠. 그런데 파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역시 그 건물의 파사드 Façade들의 고전적 매력, 이전 시대들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21세기까지 완벽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 뭐 이런 것 아닐까요? 그런데 이런 건물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으로 그치지 않고 도시의 문화 전반적으로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면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전형적인 오스만 시대의 건물. Rue de monge
파리를 여행하셨다면 도시 곳곳에서 만나보았을 스타일의 건물입니다. 이런 양식의 건축은 이 도시에 어떤 사회적 문화적 영향을 미쳤을까요? 사진 출처: Un jour de plus à Paris 링크






규격화된 파리


1편부터 계속 설명되어 듯이 오스만이 파리에서 맞이한 19세기 중반은 마치 우리나라 1960년대처럼 사회 각 분야에서 대변혁을 이루고 있고 산업은 발전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오스만은 파리의 현대화 / 미관개선 사업들을 진행하면서 상당히 많은 수의 당대의 건축가들과 함께 일을 하는데요, 그들이 이 시기 파리의 건축시장에 내놓은 정책은 말 그대로 '규격화 Standardisation'였습니다. 건축의 전체 높이와 층별 높이를 제한하고, 지붕의 모양도 제한하고, 철제 난간, 창문의 크기 같은 디테일한 부분까지 규격화시킨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파리를 생각하면 떠올리게 되는 건물의 모습들 - 6-7층의 베이지색 석제 파사드와 그에 대비되어 강조되는 검은색 철제 난간들, 그리고 길고 꽤 높아 보이는 창문들과 위쪽이 살짝 굽어있는 짙은 청색의 지붕은 모두 이때 정립된 건축 언어 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코드는 오스만 치하의 18년을 넘어서 20세기 초반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오늘날 파리 건축물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퍽 아름다운 이 건축양식이 약 6-70여 년간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고 이제는 도시 전체를 뒤덮게 된 것이죠. 오늘날 파리에서 새로 건축을 하려면 당시의 이러한 규격에 직접적인 영향은 받지 않지만, 색이나 건물의 높이, 모양 등에서 이 시대의 것과 그렇게 멀지 않은 규제를 받습니다.

이런 디테일한 규제와 수많은 건물들의 동시 다발적인 공사가 가능했던 이유는 길을 뚫는 과정에서 건물을 부수기 위해 시가 매입해야 했던 땅들을 길이 뚫린 이후 민간 부동산 업자들에게 팔았기 때문입니다. 파리시는 이 과정에서 시 그 자체가 갖고 있는 건축 규제 장치들 - 주로 높이나 지붕 모양 같은 큼직 큼직한 것들이 해당됩니다 - 에 더해, 난간이나 석조 파사드의 조각, 창문의 크기 같은 세세한 것까지 컨트롤할 수 있게 됩니다. 땅을 매매하는 과정에서 매매 계약서에 이런 디테일에 관한 조항들을 삽입한 것이죠.

발코니 난간 카탈로그
예를 들면 이런 카탈로그를 보고 건축가들이 주문을 하면 공방에서 제작 배달하는 방식이었을 겁니다. 지금과 별로 다를 바 없지만, 19세기 파리 건축에서 이미 사용되던 방식입니다.
사진 출처 : Forge salers


오스만이 이런 규제, 규격화가 파리 미관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확신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이러한 양식들은 19세기 초반부터 이미 조금씩 사용되어 오던 것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검증된 장식 요소들 중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것을 당대의 건축가들과 함께 선별해서 파리의 건축 모델을 만든 것이죠. 그러니까 없던 건물을 갑자기 새로 그린 것이 아니라, 그동안 파리에 쌓아 올려졌던 다양한 건축물들 중 당시 최신의 경향에 맞고 규격화할 수 있는 요소들을 찾아내어 파사드 모형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당시 한창 발전하고 있던 다양한 분야의 산업화에 힘입어 몇몇 공장들에서 관련 상품들을 찍어내게 하고 이 상품들의 카탈로그를 다시 건축가들에게 배포해서 그 상품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했습니다. 산업시대의 규격 성을 건축에도 끌어다 쓴 것입니다. 이러니 도시 전체가 획일화되고 일정한 수준의 아름다움을 갖춘 건축물들로 뒤덮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스만은 이러한 건축의 미적 획일성과 새로 뚫린 대로들을 잘 버무려서 하나의 예술품, 하나의 거대한 도시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2편에서 봤듯이 도시의 걷는 문화를 대로의 재정비를 통해서 안착시키는 것인데요, 새로 뚫린 대로 위에 다양한 요소들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직선 공간을 만드는 데 있어서 이런 건축의 획일성이 큰 기여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건물의 높이를 일정하게 만드고, 각 층의 높이도 일정하게 제한하면서 일정한 층(주로 3층 4층)에만 발코니와 검은색 난간을 설치하도록 해서 도로와 보도에서 건물들 하나하나가 따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선 - 지붕들로 이루어진 선, 난간으로 이루어진 선, 창문들로 이루어진 선들이 대로 시작부터 끝점까지 주욱 이어져 있는 효과를 준 것입니다. 이런 도시 구성 방식은 르네상스 시대에 발명된 회화기법인 '투시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요, 혹시 이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딴지 일보에 남아있는 제 글 중 르 코르뷔지에에 관한 글을 찾아보시면 더 자세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파리 오페라 대로 Avenue de l'Opéra
파리 오페라대로는 이런 투시도 기법을 이용한 도시건축의 전형입니다. 대로 중간에서 오페라 쪽을 바라보고 서면 난간들과 지붕이 하나의 선이 되어 오페라 쪽으로 쭉 이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죠. 사실 이런 방식의 도시건축은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이기도 합니다.  
사진 출처 : Jebulon    


이러한 건축양식은 19세기 말 산업혁명 시대를 만나 파리 곳곳에 순식간에 퍼집니다. 일단 엄청난 양의 길뚫기 공사들로 인해 생긴 빈 땅들에 이 양식의 건축물이 지어졌고, 2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길뚫기 공사는 필연적으로 일직선의 길이나 대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투시도'형식의 도시 경관을 파리 전체에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길을 정비하고 새 건물을 짓게 해주는 땅을 파는 과정에서 시는 이윤을 남겨서 그 돈으로 또 다른 길을 뚫는 일종의 수익모델이 정립이 되어서 20세기가 다가올 때 즈음에는 파리 어디를 가도 이런 건물, 이런 길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파리는 계속해서 팽창을 하면서도 '파리시'라는 이름의 행정구역은 당시까지 존재했던 파리 성벽 안으로 제한하고 이 성벽 내의 건축에만 이러한 규제를 지속적으로 적용합니다. 이 성벽은 오늘날까지 파리 외곽 순환도로라는 이름으로 파리와 그 외부를 나누는 시설로 남아 있고, 사실 이런 건축의 획일성 오늘날의 파리를 대도시라고 하기엔 조금 작은 틀 안에 가두어 버리게 되는 효과까지 낳게 됩니다. 그 획일적인 건축과 도로들이 있는 곳만이 파리로 인정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꼭 행정적인 문제보다는 정서적인 영향이 더 큽니다. 21세기가 돼서도 파리의 확장, '거대한 파리 Grand Paris'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파리의 건축양식의 특징은 외관의 장식적 요소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스만이 부여한 다양한 규제들은 새로운 건축물들의 규모와 그 건축물들이 모여서 만든 군락인 블록 îlot 의 형성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가 이 블록이라는 것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건축물들이 모여 만든 도시의 모양이 2편에서 소개한 '도보문화'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파리지엥 스타일의 도보문화를 한국 혹은 다른 나라의 도시들에 100% 가져올 수 없는 이유도 파리 특유의 도시 형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스만 시대의 건물들은 거대한 군집을 이뤄 블록 îlot를 만듭니다. 자세히 보시면 작은 폭이 좁은 건물들이 수십 채가 모여 하나의 블록을 형성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겉에서 볼 땐 거대하지만 속에는 군데군데 빈 공간이 있기도 합니다. 중정 Cours입니다. 이미지 출처 : Apple Plans



오스만은 건물들을 지을 수 있는 땅을 팔면서 이 땅들이 모여서 블록을 만들도록 합니다. 그리고 건물을 설계할 때 이 블록 안에서 만큼은 옆 건물과 맞닿아서 짓도록 규제합니다. 이웃 건물과 두 개의 벽을 필연적으로 공유하게 되는 구조를 만든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건물들 하나하나는 좁고 작아도 외부에서 보면 하나의 거대한 건물로 보이게 합니다. 파리의 대로들에서 보면 건물 한 동이 꽤 묵직해 보이고 거대해 보이는 이유입니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의 번지에 속해있는 건물 한 채의 넓이는 고작 10에서 15미터 사이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건물을 모아 놓음으로써 길에서 봤을 때는 도시가 꽉 차 보이고, 무엇보다도 1층의 상점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도록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시에 필요한 다양한 시설들 - 우체국이나 유치원과 상점들, 혹은 아뜰리에 공방들이 파리의 1층 공간에 끊임없이 지속되게 만듦으로써 도보의 공공성을 극대화시킨 것이죠. 파리의 거리에는 딱히 '주택가'라는 것이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도보와 맞닿아 있는 도시형 건물들의 1층에는 사람들이 주거하기가 불편했고, 무엇보다도 그 공간이 아니면 상점들이 들어가 장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파리에는 주택가만 따로 없는 것이 아니라 상가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파리의 대부분의 거리가 활기찬 공간이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거대해 보이는 건축물들의 군락, 블록 îlot 내부에는 상당히 큰 빈 공간이 있습니다. 중정 Cours, 혹은 안뜰이라고 불리는 옥외공간입니다. 이 숨어있는 사유 야외 공간을 통해서 거대한 건물들이 구석구석 바람이 통하게 해주는 것이죠. 이 중정이 파리 도시 형태의 두 번째 특징인데요, 이 안뜰이 없으면 블록이 무한정 커질 수가 없습니다. 사람 사는 건물은 항상 창문을 열어 볼 수 있는 외부 공간이 필요한데, 무한정 건물의 두께를 키울 수는 없는 일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안뜰의 존재가 거대한 블록들을 형성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도시 공공 공간인 길은 거대한 건축물들로 닫고 이 건축 군집 내부는 오히려 비워 두는 것이죠. 길은 한국에서 흔히 보이는 대로들처럼 탁 트인 열린 공간이 아니라 오밀조밀 닫혀있는 공간이 되어 오히려 사람 간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고 건축물의 군집은 거대하지만 충분한 바람과 햇살을 공급받을 수 있는 방식입니다.


오스만 건축의 전형적인 중정의 모습
이런 사유 옥외 공간은 주로 공방들의 작업방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그냥 왔다 갔다 지나가는 공간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대부분 건물에 한 명씩 있는 건물 관리인이 이렇게 많은 화초를 길러 놓기도 합니다. 사진 출처 : MiresParis


파리는 이 중정으로 중심이 비워진 블록 형태의 도시구조를 통해 세계에서 손꼽히는 인구 밀집도를 얻었습니다.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는 서울이나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고 있는 맨해튼보다도 파리의 인구 밀집도가 더 높습니다. 인도나 남미 일부 도시들의 빈민촌을 제외한 대도시에서 파리 수준의 인구 밀집도를 갖고 있는 도시는 없습니다. 파리의 도시문화, 도보문화가 꽃피우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원래 도시는 사람이 모이면 모일 수록 더 다양한 문화교류가 생성되고 인류는 거기서 지식의 발전을 이루게 되는 법이죠. 문제는 그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시스템인데, 파리의 도시구조가 현재로서는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사람을 살게 하면서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게 해주는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오스만 파리의 문화적 다양성


도시가 인류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너무 거대하고 철학적인 질문이긴 합니다만, 전 생각보다 그 답은 간단하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죠. 그렇기 때문에 도시의 다양성은 여전히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큰 숙제입니다. 다양한 특성을 갖은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엄청 복잡한 일입니다.

특히 오스만의 파리와 같은 획일화된 건물과 획일화된 도시형태만이 존재하는 도시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아이들이 거주하는 아파트로 친구를 평가는 문화도 비슷한 이유에서 파생된다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아파트, 혹은 아파트 단지에 특정 계층만 몰려 살다 보니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이죠. 그런데 파리는 '문화'면에서 어디 가서 꿀리는 도시는 절대 아닙니다. 20세기 중후반까지, 아니 오늘날까지도 꽤 자주 세계의 문화 수도라는 평을 듣는 편이죠. 파리가 문화적 다양성을 꽃피워 이러한 평을 듣는 것과 획일화된 도시경관, 얼핏 보면 굉장히 동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스만 시장의 도시계획은 파리가 문화와 지식의 교류가 너무나도 자유로운 곳이 되는데 크나큰 기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여는 파리의 지성이 탄생했다고 하는 테라스 카페와 신문 가판대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스만 시대의 건축물의 내부에도 아주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다시 오스만 시대 건물의 외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번엔 창문 위주로요. 자세히 보면 1층, 2층, 3층, 4층... 그리고 지붕층까지 창문의 크기가 모두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지어지는 건물들을 상상해보면 너무나도 이상한 일입니다. 층층마다 높이가 재각각이다는 거니까요. 그런데 오스만 파리에서는 대부분의 건물이 이러한 층 비율을 유지했습니다. 위에서 보여드렸던 각 층의 난간과 창문들이 선을 이루는 것도 모든 건물들이 비슷한 층고 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죠. 19세기의 파리는 왜 이런 형태를 띠게 되었을 까요?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이 제가 앞으로 쓸 대부분의 글들의 주제의식입니다.

모든 건물을 빠른 속도로 일정한 퀄리티로 건설하기 위해서 건축의 규격화와 획일화는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도시민이 일정한 경제력과 일정한 퀄리티의 집을 소유하거나 빌릴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사실은 19세기 중반에는 이미 꽤 일반화되어 있었던, 각 층고를 다르게 하는 건축입니다. 한 건물에 각 층마다 다른 성질의 공간을 만들어 서로 다른 사회적 층위의 사람들이 함께 거주하게 되는 것이죠.


오스만 시대 건물의 내부를 코믹한 일러스트로 그린 삽화 작품입니다. 자세히 감상해보시길 권합니다. 1층의 작업장, 2층의 부자들의 집, 3층의 중산층 가족, 4층의 서민 가족, 지붕층의 빈민의 집,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들과 건물 외벽의 디테일까지. 제가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출처는 이미지에. 작가 : Bertall 의 1845년 작품

동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인 경우로 예시를 들어 보겠습니다. 1층에는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상점 혹은 공공시설이 있습니다. 2층은 중간층 entre-sol이라고도 부르는데 주로 1층 상점의 창고가 되곤 합니다. 상점 주인가족의 주거공간이기도 하죠. 3층과 4층은 로열층입니다. 부르주아 계급의 부자들이 사는 곳인데, 오늘날에도 파리의 아파트 하면 떠오르는 멋진 공간들은 대부분 이 층에 속합니다. 발코니와 난간들이 3, 4층에 주로 분포되어 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건물에서 가장 높은 지붕 밑의 5, 6층이 로열층이 아닌 이유는 19세기 중반의 파리에는 아직 엘리베이터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4층은 상점 공간을 제외하면 땅에서 제일 가까운 층입니다. 5층과 6층은 주로 중산층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파리의 주요 노동자 계급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맨 꼭대기층, 지붕 밑에는 작은 원룸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줄지어 있습니다. 이런 곳은 오늘날도 엘리베이터가 닿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숙식을 하며 2, 3층의 부르주아의 집을 관리하던 하녀들이 숙식하던 집입니다. 돈이 없는 노동자들이 살기도 했죠.

이러한 형태의 공동주거, 즉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이 한 건물에서 살며 마주치는 주거 형식은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거의 변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습니다. 조금씩 변화는 있었지만 여전히 지붕층에는 주거가 불안정한 사회적 약자들, 빈곤층, 혹은 돈 없는 유학생들이 살고 있고, 1층에는 상점들이 즐비하며, 3, 4층에는 부자들이 멋진 아파트를 꾸미고 삽니다. 이것이 유지되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 관성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각 층의 층고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장 좋은 층인 3, 4층은 무려 3.5미터의 층고를 자랑합니다. 한국의 아파트들보다 1미터 이상 높은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굉장히 럭셔리한 공간이 되고, 당연히 집값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5, 6층은 이제는 엘리베이터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파리의 지가가 워낙 높기 때문에 꽤 부자들이 사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3, 4층과 차이가 없어진 것이죠. 그러나 지붕층으로 가면, 건설 당시 나누어 놓았던 벽들을 해체하기도 쉽지 않고, 게다가 경사진 지붕 때문에 어떤 부분은 누워서 머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층고밖에 안되기 때문에, 사실상  주거공간으로서의 퀄리티가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파리에는 이런 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여전히 수십만이고, 덕분에 꽤 낮은 가격으로 이 원룸들이 채워지죠.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의 건물에 가로수길의 카페와 압구정 현대아파트, 도봉구의 빌라와 노량진의 고시원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건축형태가 한 건물에 여러 사회적 층위의 사람들이 한지붕에 살아가게 되는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에도 그렇듯이 19세기에도 그랬듯이 하나의 번지수, 하나의 대문, 하나의 로비에서 서민층과 중산층, 그리고 부유층의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살아가지는 지를 일상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도시의 삶이 하나의 건축양식으로 구현됐다고 볼 수 있죠. 물론 파리 내부에도 동네마다 부유한 곳과 조금 못 사는 곳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파리시는 이런 전통을 유지하려고 꽤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이 사는 곳에도 서민아파트를 짓는다 던가, 각 건설에 일정 부분 임대주택을 의무화한다던가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사회는 이런 도시 건축적 배경이 있기 때문에 구현 가능한 것입니다. 오스만의 건축 없이 파리가 지성과 예술의 도시가 될 수 있었을 까요? 그들이 이루어낸 민주주의와 탈권위주의, 그리고 그것을 지지한 부르주아 층에 이런 함께하는 삶이 어떤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까요?


2015년 일어난 샤를리 에브도 테러사건 때 파리 시민들은 레퓨블리크광장에 모여 그들의 단결된 시민의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줬습니다. 파리의 끊이지 않는 집회와 시위, 그리고 때로는 수만 명이 모이는 이런 추모집회와 그 배경의 도시건축과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출처 : Flikr / sébastien amiet;l


이것으로 파리 오스만 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사회에 흐르는 사상과 문화가 건축과 도시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역사를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의 도시경관을 연구하고, 건축과 집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공간들이 만들어 내는 문화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그 반대, 즉 문화와 사회가 다시 건축과 도시에 미치는 영향도 저에게는 매우 중요한 관심대상입니다. 파리와 오스만 시장 편이 저의 그런 생각을 잘 전달하였으면 좋겠네요.

제가 10년이 다되도록 살아가고 있는 공간인 파리를 뜯어보면서 서울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습니다. 도시와 건축뿐 아니라 사람들이 대화하는 방식,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도 정말 달랐기 때문입니다. 오스만이 만들어놓은 파리는 결과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보도라는 도시공간에서 걸어 다니면서 서로 만나고, 집에 가면서도 한 지붕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되는 공간입니다. 파리의 진짜 힘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다음 주부터는 서울로 돌아와 서울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커버 그림 : Rue de Paris, temps de pluie / 작가 : 구스타프 카이보트 Gustav Caillebottes, 1887 작. 미국 시카고 소재 Art institute of Chicago 소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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