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iplash Apr 29. 2019

남보다는 먼,
가족보다는 가까운

<어느 가족>

                                                                            <스포 주의>




어떤 영화들은 영화를 소개하는 영상에서 흥미를 느껴 보게 되면 그 소개 영상 때문에 그 영화의 진정한 흥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영상을 안 보면 되지 않냐 할 수 있지만, 요즘 대부분 좋은 영화를 알게 되는 통로가 그런 쪽이다(그런 채널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겠지).


그런데, 이번 영화는 조금 달랐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뭔가, 이성적으로 형용하기 어려운(하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그런 복잡한 관계의 틀을 가져와 우리의 이야기를 한다. 그게 참 여러모로 그의 영화들이 푹 익힌 맛을 내기도 하고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쉽게 그 영화를 잊지 못하고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어 지게 한다. 그의 영화들을 전부 영화를 소개하는 영상에서(전부 이동진 평론가님이 나오신다) 소개된 걸 보고 보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도 그 여운이 덜하게 되었거나 흥을 깨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총 세편 밖에 보지 못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다 마을 다이어리>, 그리고 세 번째로 본 <어느 가족>이다. 이 영화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지만, 내가 받은 감동은 세편 모두 비슷했고 다 한동안 그 영화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세편 모두 가족에 대한 영화이고 우리가 본능적으로 쓰다듬기 어려운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제를 가지고 너무 아름답게 영화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쥬리를 집에 데리고 오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 가족은 마치 이 아이가 이제 막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대하고 기존 멤버들에게 아이를 소개한다. 잘못된 만남이지만, 정식으로 받아들이고 난 이후에는 모두가 절도를 제외하고는 정말 가족같이 생활한다. 영화 전반부에 보여주는 그 생활이 따듯해, 보는 관객(나)으로 하여금 이 가족의 행복이 계속 지속되기를 바라게 된다 진심으로. 마치 그런 마음을 감독이 의도적으로 깔아 둔 것 같이. 


이들은 다들 피 한 방울 섞여있지 않은 가족이다. 이동진 평론가님의 말을 빌려 말하면 서로가 '호혜성'으로 모인 집단이라고 한다. 그들이 가족과 떨어져 산다는 것을 남에게 들키면 안 되는 사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있어서 욕심이 있어서 그들은 서로를 데리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정말로 가족처럼 의지하고 얻게 된 것을 모두 나누고 그들을 위해 인생에서 포기하는 것들이 생긴다. 그들의 가족과는 연락조차 하지 않지만, 이들과는 서로 일상을 나누고 추억을 쌓는다. 


이런 아름답고 편안한 일상과는 반대로 영화 후반부에는 그들의 과거가 밝혀지고, 그들이 흩어지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런 사건들 앞에서 그들은 서로를 모르는 사람으로 대해야 하고, 도망가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보다는 분명 가까운 존재들이었지만, 그들은 가족이 정말로 필요한 상황이 오게 되면 서로를 남보다 더 먼 존재로 취급해야만 했다. 그것이 그들만의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우리의 감정적인 마음과 이성적인 생각을 대변하고 서로 충돌하게 만든다. 사회가 그리고 대중매체가 원하는 방식이 맞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삶이 우리가 정한 가족의 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불행했을 거라는 생각은 오만일 것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이 흩어지는 일에 토를 달지 않는다. 이야기에 깊이를 알게 되더라도 대중이 원하는 건 그 개개인이 진심으로 무엇을 바라는 것이었을까가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대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면 하길 바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감정적인 마음이 원하는 결말로 끝나면 잘못되었다는 것을 끊임없이 되뇌게 된다.


그들이 흩어질 때, 그들이 서로의 진실을 알고, 그들의 행동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그 배신감에 서로를 결국에는 떠나게 되고, 그것이 결국에는 그들이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까. 맞다. 그들은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없다. 네 개의 다리를 가진 책상에 높이가 맞지 않아 그 다리 하나 아래에 종이를 접어 끼워넣든 잡지를 아래 놓든 그것이 일시적으로 책상의 높이를 맞춰 책상의 역할을 해줄 수는 있어도 영원히 그 책상의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한 동거는 이들의 '진정한' 가족들과 대조된다. 우리에게 가족의 무게, 피의 무게를 묻고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비슷한 내용을 담으면서도 이 영화의 결말은 아름답게 끝나지 않는다. 애초에 관중에 바람(내 바람)대로 끝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질문하게 된다. 타협점이 흐릿하다. 감독은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우리가 결국 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묻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이 늘 등에 업는 것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