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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plash Jan 28. 2019

사랑이 늘 등에 업는 것은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최근에야 친구가 한 번 보고 이야기해보자는 말에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에 이 영화를 다 봤다. 예전부터 항상 명작이라고 듣던 영화여서 언젠가는 보게 되리라 생각했던 영화였고 지금에서야 이 영화를 보게 된걸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그녀의 사촌 카와지리가 그녀의 사망 이후 그녀의 집을 청소하는 와중 그녀 주변 사람들을 통해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이야기를 주인공의 상상 속에서 화려한 영상미를 통해 전해진다. 친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저런 삶도 있으니 그녀의 삶을 보고 다른 이들이 안도감을 느끼라고 만든 영화 같다고 말했다. 동의했다. 아마 작가는 표면적으로 그런 느낌을 분명 의도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렸을 적 TV에서 스쳐가듯 보게 된 이 영화는(그때 당시 영화의 제목을 몰랐다) 그 장면이 너무 처절해서 혐오감을 느꼈고, 나중에 이 영화의 제목을 읽고 그 영화가 이 영화의 한 장면이겠거니 하는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너무 처절해서 혐오감을 줘서 이 영화가 진짜로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그 충격에 가려지는 것이 없지 않다. 하지만 더 깊게는 이 영화는 사랑의 형태와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본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츠코는 어려서부터 아픈 자신의 동생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사랑의 결핍을 느낀다. 고등학교 선생님이던 그녀의 삶은 그녀를 짝사랑하던 고등학생 요이치의 단순한 거짓말로 틀어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 이후로 굉장히 타락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간다. 계속해서 타인에게서 사랑을 갈구하고 잡히지 않는 그 사랑을 잡으려고 애쓴다. 그녀는 항상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그렇게 처절할 정도로 헌신적이게 된다. 그녀는 그런 사랑을 희망으로 느끼며 살아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에서 마츠코 같은 헌신적인 사랑은 결국 자신이 준 만큼의 사랑을 보상받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마음 안에서 조금씩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반대로 이런 사랑을 받은 요이치는 그런 사랑이 주위에 흔한 듯이 많을 때는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그가 감옥에서 신약성서를 통해서 그녀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절감하고 그녀를 다시 찾게 된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사람들이 생활이 풍성할 때보다 궁핍할 때 신을 더 찾고 그 사랑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처럼 헌신적인 사랑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본성일 것이다.


사랑이 가장 아름답고 위대하게 보이는 시점은 그 사랑의 주체를 떠나보내 다시는 볼 수 없을 때부터이다. 이 영화의 시작은 마츠코가 죽은 시점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마츠코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사촌 카와지리도 그런 처절하고 혐오스러운 그녀의 인생에서도 그 헌신적인 사랑을 실천한 그녀의 삶을 듣고 점점 생각이 변화된다. 마츠코 또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집을 나가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에야 아버지가 그녀를 얼마나 찾았고 사랑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 영화에서 신약성서를 인용한 것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보다 다시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지금 그의 사랑을 깨닫고 따르고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처럼 그런 헌신적인 사랑은 화가가 죽고 난 이후에 그의 작품들이 그 화가의 이름을 알리듯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그들이 살아있을 때보다 죽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더 위대해진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고 마츠코의 삶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둘의 사랑이 동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사랑의 형태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신의 사랑 같은 헌신적인 사랑은 일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절대 쉽지 않고 고단하다 혐오스러울 만큼. 우리가 늘 꿈꾸는 '있는 그대로를 사랑', '아낌없이 주는 사랑'은 어쩌면 그런 사람의 본성에 잘 끼워지지 않는 어색한 퍼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은 늘 미련, 아쉬움, 후회 같은 것들을 등에 업는다. 누군가에게 받은 사랑은 사랑하는 이가 흘린 눈물에 젖어 그 무게가 물 먹은 솜처럼 점점 무거워져, 우리가 어깨에 견딜 수 없다고 느끼게 될 때야 비로소 그 짐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타이밍은 항상 늦어 그 사람을 다시는 보게 될 수 없을 때 그 짐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 그걸 후련하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결국 누구에게나 사랑의 형태는 비슷하다. 

마츠코에게도, 요이치에게도, 마츠코의 사촌 카와지리에게도, 받는 사랑보다 해주는 것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사랑은 항상 받는 이에게로부터 외면받는다는 것을 이 영화는 모든 인물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헌신적인 사랑은 그 형태를 쉽게 깨닫지 못하거나 결국 익숙해지거나 혹은 물려버린다. 그리고는 다시 그런 사랑을 찾게 된다. 다시 찾게 되면 또 언젠가는 물려버릴 것이다. 허나 다시는 못 보게 된다면, 진정한 사랑의 형태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 영화의 전개 방식(?)이 왠지 다른 영화에서 많이 본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다른 영화를 베꼈다는 생각보다 이 영화가 그런 전개의 오리지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이미 많은 영화인들에게 끼친 영향이 어마어마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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