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 리뷰
스포일러 주의
족발을 먹으면서 봤다. 피글렛의 족발은 무슨 맛일까 문득 궁금했다. 아 물론 그 소시지도.
혹시 영화 속 미자를 응원하였는가.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영화 속 지하상가 족발천국 광고판에 돼지 그림을 잊을 수 없었다. 이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그 짧은 테이크에 사실 다 담겨 있었다. 돼지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웃는 족발 광고에 얼굴이었다. 돼지는 나에게 목살, 등심, 삼겹살, 아롱사태에 불과한 것이기에 나는 그 돼지가 불편했다.
봉준호 감독님의 판타지물은 동떨어진 가상의 생물로 우리의 시선을 사회로부터 살짝 멀어지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사회에 대한 그림을 더 적나라하게 볼 수가 있다. <괴물>도 <옥자>도 그러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생각보다 핸디캡이 몇 가지 있었다. 그리고 감독은 그 핸디캡들을 찾아내는 방법에서 이 영화에 의미들을 집어넣었다.
첫째로는 판타지 속 생물이 화면에 나오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다. CG가 자연스러웠지만 왜 다른 진짜 생물이 아닌 새로운 가상의 생물이어야만 하냐는 질문이 생겼지만 이는 어쩌면 이 영화에 우리가 미자의 편을 들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들어있고 영화가 비판하고 싶은 대상이 뚜렷해지는 근거가 된다.
둘째는 영화 속 악역들의 연기다. 보는 내내 할리우드의 훈남 배우 제이크 질렌할의 연기는 거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다. 틸다 스윈튼의 연기는 익숙하지만 역시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이들의 연기가 과장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이 그렇지 않았다면, 지안카를로처럼 품위가 있는 비즈니스맨이었다면, 우리는 어쩌면 이들에게 더 우리의 감정이 몰입하게 되었을 것이다.
미자에게 옥자는 가족이지만 옥자는 태어나기를 사육을 위해 태어났고 기업의 소유물이었다. 또 그 탄생의 이유로 AFL: 동물보호단체에게는 자신들의 신념을 위한 도구로 쓰이게 된다. 영화 초반에 미자와 옥자는 깊은 유대감을 보여주지만 옥자 탄생의 이유 때문에 그 유대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런 옥자의 팔자를 거스르는 역이 미자다. 미자는 영화 속 가장 극적이고 거칠다. 반대로 기업과 동물보호단체들의 움직임은 다소 보편적이다.
그리고 그 보편성을 미자라는 개인이 무모하게 뚫고 나온다. 그리고 그 무모함이 주는 이질감(순수함)은 알고 있지만 회피하는 사회 안에 사육하는 동물에게 이뤄지는 동물학대를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보게 만든다. 가축(사회)를 가족(개인)으로 관점을 바꾸어야 만한다. (어린아이가 아닌) 관객에게 미자의 행동은 이질적일 수밖에 없기에 악역들은 더 괴랄해져야만 했다. 진짜 악역처럼 보이기 위해.
하지만 결국 미자는 옥자를 돼지 순금과 맞바꾼다. 아니 옥자의 값을 지급해야만 했다. 옥자는 가족이지만 돈을 지불해야 하는 존재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미자의 순수한 마음도 결국 타협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가축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 애완동물이 된다. 나의 반려동물은 소중하다지만, 고기로 썰어져 가공되어 나오는 고기들은 옥자로 보이지 않는다. 이 이질적인 마음은 가끔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문제인 걸 알지만 육식의 소비 또한 결코 쉽게 포기할 수 없기에
우리는 여전히 미자의 순수함이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