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낳으라고만 하지 말고
1. 파격적인 저출생 대책이라니..?
안타깝게도 한국의 정책 만드는 결정권자들은 나이 많은 남자들이기 때문에 저출산 문제에 대하여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 답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왜? 그들이 파악하는 원인이 단순하니까...
애 낳으면 일인당 돈 일억 주겠다! 이런 식의 정책을 '파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전혀 파격적이지 않다. 진부하다 진부해. 다른 의미의 '파격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얼핏 보면 저출산과 관련 없어 보일 수 있는 정책들이지만 뿌리깊은 근본 원인(root causes) 을 건드리는 정책들. 하지만 뿌리깊은 원인을 건드린 다는 것은 현재 사회 시스템을 그야말로 뿌리부터 '뒤흔드는' 일이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이겠지.
뿌리깊은 근본 원인. 아마도 이미 한국에서 관련된 심층 연구들이 진행되거나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가임기 여성'에 해당되는 사람으로서, 왜 애를 낳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단순히 '애 키우기 힘들다'를 넘어선 아주 깊은 고민이 있는데, 내가 2,30대 여성으로서 같은 2,30대 후배, 친구, 선배들과 대화해보면 다들 공감하는 내용들이다. 여자들은 모두 답을 알고 있다. 다만 말을 하지 않을 뿐. 왜? 말하는 순간 공격과 반박을 듣게 된다.. .어차피 말해봤자 욕만 먹고 바뀌는 것도 없는데 뭐하러 말을 하는가.
여자들은 싸울 의향이 없다. 싸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뭐하러 기운 빠지게 싸우는가? 그냥 조용히 뒤 돌아서 떠나면 되는데. 말 그대로 reproduction (번식)에 있어서 아쉬운 사람은 여성이 아니다.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는 것을 여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남성들이 좀 더 초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여성'은 태생부터 어떤 의미의 '파워/권력'를 지닐 수밖에 없는데, 지금껏 가부장제도가 그 파워를 '남성'에게 주는 역할을 했다. (여성은 반드시 남성과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아야 한다라고 인지시키고 제도를 만듬)
현재 그런 역할을 하던 가부장제도가 흔들리면서 여성은 자신이 가진 '파워'를 알게 모르게 인지하기 시작했고, 남성은 자연스럽게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2.이기적인 여자들이 왜 애를 낳지 않느냐, 묻는다면, 현재는 과거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라 대답하겠다
2-1. 자신을 위한 결정
-사람은 사회생활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인지한다. 우리는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으로서, 남성으로서 어떠한 역할이 우리에게 기대되는지 배운다. 아들이든 딸이든, 우리는 기본적으로 가정에서 아빠와 엄마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본다. 가치관의 충돌은 우리가 (특히 딸들이) 집에서는 가부장적 문화를 경험했는데, 학교에서는 현대적 교육(평등, 자유, 인권 등)을 받으면서 일어난다. 이와 더불어 인터넷, 교통등의 발달로 외부(다른 나라, 다른 문화)들의 교류도 활발해지면서 타국, 타문화와 비교가 가능하게 된다.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지금껏 기대되어 왔던 '아내, 엄마, 딸, 며느리' 등의 여성적 역할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임신과 출산에 관련한 신체적 위험성 또한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인지하게 된다.
- 많은 딸들이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마'라는 말을 듣는다. 지금도 육아를 하는 여성들의 친정 엄마들이 자신이 힘든데도 딸의 애를 봐준다고 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 딸이 지금껏 한 일을 포기하게 하고 싶지 않다 ( 나처럼 살지 마) 이다. 많은 엄마들이 딸에게 결혼하고 애 낳으라고 잔소리 하지만 딸들이 '나 일도 해야 하는데 애는 누가 봐주고 누가 키워줘'라고 하면 다들 입을 다문다. 딸들이 일 관두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은근히 많은 엄마들은 딸에게 굳이 결혼할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엄마들이 살아온 결혼생활, 딸이 지켜본 엄마의 결혼생활은 애 키우고, 밥하고, 청소하고, 남편 뒤치닥거리 하고, 돈 부족하면 알바 뛰고, 시댁 뒷바라지 하고, 인데 과연 그 경험을 반복하고 싶은가, 그렇게 살지 않으려면 어떤 결혼생활을 해야 하는지, 혹은 결혼을 하지 않을지에 대한 고민은 기혼 미혼을 떠나 모든 여성들이 하는 고민이다.
- 커리어. 애를 낳으면 일을 못한다. 휴직 자체가 욕먹는 일이고, 잘 쓸 수도 없는 것 부터 시작해서, 복직도 힘들고, 승진은 물건너 가고, 한명은 그렇다 쳐, 둘째 낳는다고 또 출산 휴직? 회사 분위기상 말도 안된다. 어쩌면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개인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 이익을 주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강제로 남녀 모두 육아 휴직 보내고, 출산 휴직으로 '차별'받았다는 말만 오면 엄청난 벌금을 때리고, 출산휴직 보내면 오히려 회사에 지원금을 줘서 회사에서 조직적으로 출산과 육아를 지원하도록 해야 한다.
- 예전에는 사회 시스템이 딱 정해져 있어서 결정 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에 따르면 아직 생존과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 자아실현까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우리나라는 가난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선택지가 많아졌다.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확실해졌다. 과거의 여자들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자아실현의 꿈을 넘겼다. 그것이 유일한 자아실현의 방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자아실현이 가능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저울질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이를 낳기 전 좀 더 '내 자신'이 되고 '내 인생'을 누리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아이를 위해 어느정도 포기할 것인가. 물론 아이를 낳는다고 자아실현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성 선배들이 많은 진지한 조언을 해준다(먼저 결혼하고 애 낳은 사람들). '신중하게 생각해라. 결혼하고 애 낳기전 더 많이 놀고 더 많이 여행다닐걸, 하고 후회한다. 너는 후회하지 않게 많이 놀고 많이 여행다녀라.' 이런 조언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된다. 나의 자유를 어디까지 포기해야 하는가. 남자건 여자건 마찬가지일 것이지만, 여자는 자연스럽게 '주 양육자' 로서의 자신의 삶을 상상하게 되는 것 같다.
2-2. 아이를 위한 결정
-'주 양육자'로 아이를 키울 것을 생각하면 더 두렵다. 특히나 어느 칼럼에서 말한 것처럼 "행복한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비슷한 경험을 되풀이시킨다는 게 옳지 않다" 고 말하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세대는 급속한 경제 성장과정에서 그 그늘을 경험한 세대다. 아빠는 일하느라 아침부터 밤까지 회사에 있고, 접대/회식 등으로 술마시고 들어온다. 피곤해서 주말에 놀지 못하고, 아빠와 행복한 경험이 적다. 세대차이도 심하다. 엄마도 마찬가지로 각종 집안 일, 육아, 그리고 돈 걱정에 치여서 정신 없었고, 현 20대 까지도 은근히 가정 폭력(신체적 폭력까지는 아니더라도)의 경험자도 많다. 왜 서점에서 심리학 책, 특히 딸과 엄마의 관계에 관한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는가. 지금 20,30대는 과거 급격한 산업화와 사회 변화과정에서 개인이 받은 상처, 내면 아이를 힐링, 치유, 그리고성장으로 나아가는 것에 점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 과연 '이런 내'가 아이를 '잘' 키울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깊어진 것 같다.
-'이런 나' 뿐 아니라 '이런 나의 상황'도 태어날 아이에게 최선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내가 자랐던 환경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자식을 키우고 싶은 것은 인간으로서의 본능 아닐까? 넉넉하게 옷도 잘 입히고, 먹을 것도 잘 먹이고, 놀러도 잘 다니고, 교육도 잘 시키면서 키우고 싶은데, 요즘 세상에 재정적 자신이 없다. 나 하나, 혹은 우리 부부, 혹은 나와 부양가족(부모님 등)을 책임지기도 벅차다.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아이를 행복하게 키울 자신이 있느냐는 것이다. 행복하게 키운다는 것은 부모로서의 자신감, 재정적 여유 뿐 아니라 내가 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아이가 학교 생활을 즐겁게 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지도 포함된다. 9-6시 일하느라 애를 학원에 뺑뺑이 돌려야 하는데 어떻게 애가 행복할 수 있겠는가.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경쟁사회로 편입되면서 영어 수학 공부를 시작하는데 어떻게 애가 행복할 수 있겠는가. 파격적인 정책을 내놓는다면, 하이브리드로 주 2일 오피스 출근을 법령화 해라. 엄마아빠가 번갈아가면서 하루는 회사 출근하고 하루는 집에서 일하면서 학교 보내고, 하원 시키고 숙제 봐주고 해라. 출근을 해야만 하는 직장이라면 나라에서 육아 지원금으로 5일 월급 보장하면서 3일만 출근하라고 해라. 일하는 시간을 늘리는 대신 줄여라. 일과 육아둘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 당연히 둘다 가능한 정책을 만들어라!
-아이의 학교생활을 생각하면 나는 더더욱 '한국에서' 애를 낳고 싶지 않다. 나의 십대 시절을 보내면서 나는 죽어도 이민을 가겠다고(그때는 애 낳는 것을 생각했으니까) 절대로 여기서 애를 낳아서 똑같은 교육을 받도록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십대때 학교에서 불행했다. 지금도 돌아보면 아무런 감흥이 없다. 죽고 싶다는 친구들도 여럿 만났다. 한국에서 과외, 학원 강사를 하면서 이미 눈에 불이 꺼진 아이들을 보았다. 심지어 집이 그렇게 부자고, 벌써 초등학생이 중학교 3학년 공부를 할 만큼 똑똑한데도 공부가, 삶이 지겨워서 동태 눈깔이 된 아이들. 반면에 내가 해외에서 만난 외국 친구들은 나랑 차원이 다른 십대를 보냈다. 연애도 하고, 파티도 하고, 스포츠도 하고,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미래를 계획해 나가는 느낌이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하는데, 대체 우리 교육부에 무슨 백년계획이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교육의 비전은 무엇인가? 똑똑한 애들 선별해서 전문직 시키고 나머지 애들은 취직시켜서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비전인가? (내가 보기엔 그렇다) 그런 비전을 가진 나라에서는 애를 키우고 싶지 않다.
3. 애를 더 낳으라고만 하지 말고, 있는 애나 잘 키울 생각을 하세요
아이들이 학대 당하는 것을 본다.
유치원이 부족하고, 소아과가 부족한 것을 본다.
수학여행 가서 애들이 죽는 것을, 어이없는 음주운전 사고로 애들을 잃는 것을 본다.
기술 배우라고 전문 고등학교로 애들을 보내놓고 졸업하자마자 취직 시켜서 노동 착취하다가 죽어가는 아이들을 본다.
왕따, 학교 폭력 문제로 애들이 고통받고 죽어가는 것을 본다.
과도한 입시 경쟁에서, 입시 후에는 취직 경쟁에서 젊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을 본다.
억눌린 청춘들이 제대로 에너지를 발산할 곳이 부족하고, 여전한 안전 불감증으로 인해 압사 사고로 하루아침에 하늘나라로 떠난 이야기를 본다.
혼자서 어떻게 살아보려다가 좁은 원룸에서 고독사&자살 하는 청년들과 반대로 화려한 연예인임에도 결국 남에게 티도 내지 못하다가 목숨을 끊는 청춘들을 본다.
어이없이 사기를 당해 하루 아침에 삶이 무너진 젊은이들을 보고(전세사기), 심리적 지원이 전혀 되지 않는 사회에서 수많은 친구들이 사이비 종교로 흘러가는 것을 본다.
'정상적인 사회 제도' 바깥에 있는 아이들 - 시설 출신의 아이들, 의도치 않았던 임신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 - 이 여전히 소외되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들을 본다.
똑똑한 인재들이 과학자나 수학자가 아닌, 결국 사교육 시장으로 유출되는 것을 본다.
투자 비용이 많이 들어간 여성 인재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결국 경단녀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본다.
회사에서 과로로, 왕따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본다.
지구 온난화와 각종 환경문제가 심해지면서 몇년 후에는 맑은 공기가 사라지고, 깨끗한 물을 얻기가 힘들고, 사막화가 된다는데 미래에 대한 대책도 없으면서 대신 애는 낳으라고? 사람으로 미어 터지는 이 대한 반도의 절반밖에 안되는 좁은 땅덩이에 어째서 사람을 더 채워야 하는가.?
현재 정책 입안자들은 애는 낳기만 하면 알아서 큰다는 조선 후기 마인드를 여전히 가지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20명 낳아서 10명 쓸모 없어도 나머지 10명 쓸 만 하면 된다는, 물량공세 그리고 엘리트 주의.
하지만 그런 마인드로는 20명은 커녕 5명도 안 낳는다. 그게 현재 상황이다. 10명을 낳으면 10명 모두 잘 키워서 100% 활용하겠다, 한명도 놓칠 수 없다,라는 마인드로 '파격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 그 변화는 시스템, 그리고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가장 원론적인 '가치(value)'의 변화일 것이다. '성장'만을 중시하는 사회의 변화. 무작정 '선진국'만 따라가는 대신 멈춰서 돌아보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과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이루어 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애 낳고 키울 만한 행복한 사회인가? 아니라는 것이 초저출생 지표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에는 우리나라도 오픈 이민으로 갈 것인가. 서구권 나라들처럼.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것 보다 발등에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더 쉬운(혹은 쉬워보이는) 길로 가겠지. 답답허다.
+
웃긴 건, 초저출생이라고 미디어에서 난리 치는 걸 보면 충분히 애 없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예시 : 요즘 여자들이 애는 안키우고 개나 키운다) 이 정치권에서 엄청나게 나올만도 한데, 안 나온다는 거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
'퍼스트 부부'조차 애가 없으니까.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답이 없다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