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벡 시티의 숨겨진 감성
따그닥 따그닥 리드믹컬한 말발굽 소리가 나를 지나쳐 사라졌다. 소리의 주인공인 전통 사륜마차를 쫓아 두터운 성곽문을 통과했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퀘벡 시티 도심이다. 퀘벡 시티는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 열풍 후 본격적으로 한국인에게 인기를 얻은 관광지이다. 나 역시 종영 후에 책까지 사서 봤을 정도로 푹 빠졌던 기억이 있다. 좋아하는 드라마의 명장면 배경을 직접 감상할 수 있다니, 기대에 들떠 걸음이 빨라졌다.
걸음을 옮기다 보니 사라진 말발굽 소리의 빈자리를 감미로운 멜로디가 흘러와 채웠다. 어디선가 들어본 익숙한 멜로디였다. 프랑스 탐험가 '사뮈엘 드 샹쁠랭' 기념비 뒤에 모습을 반쯤 숨긴 현지인 버스커가 색소폰을 멋들어지게 연주 중이었다.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왠지 모르게 처음부터 익숙했던 이 멜로디는 바로 드라마 <도깨비>의 주제곡인 <Beautiful Life>였다! 색소폰 연주로는 처음 듣는데 이 노래에 담긴 감정을 표현하는데 색소폰은 완벽한 악기였다. 퀘벡 시티의 분위기에도 위화감 없는 이국적인 멜로디라는 걸 새삼 느꼈다.
주위 관광객들도 비슷한 감동을 느꼈는지 동상 주변에 앉아 연주를 감상했다. 다들 이 곡이 한국 드라마 주제곡이라는 건 꿈에도 모를 거다. 이 노래를 <도깨비> 특유의 몽글몽글한 감성에 연결해서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인 듯해 흐뭇하면서도 안타까웠다. 나와 눈이 마주친 버스커 아저씨만이 나에게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상 바로 뒤편에 웅장한 샤토 프롱트낙 호텔(Chateau Frontenac)이 보였다. 이 호텔의 이름을 풀어 보자면 프랑스어로 ‘샤토’는 성, ‘프롱트낙’은 17세기 말 퀘벡 시티의 프롱트낙 백작의 이름, 하여 ‘프롱트낙 백작의 성’이다. 호텔은 이름 그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동화 속 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5성급 호텔의 두텁고 빛바랜 벽돌에는 무게감이, 청록색의 구리 지붕에는 옛 유럽의 멋스러움이 담겨있었다. 중세 시대 귀족이 살았을 것만 같은 이 호텔도 물론 도깨비 촬영지였다.
그다음으로 극 중 도깨비와 도깨비 신부 지은탁이 함께 방문했던 '라 부티크 드 노엘' (La Boutique de Noel de Quebec) 크리스마스 장식품 가게에 들렀다. 미리 경고하지만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깨비보다는 지름신을 더 조심해야 할 가게이다. 금칠을 한 유리공예 장식품뿐만 아니라 스누피와 스타워즈 등 캐릭터 장식품까지 남녀노소 취향을 골고루 고려한 장식품들이 입구부터 구석까지 빈틈없이 진열되어 있는데 쇼핑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지막으로 아기자기한 유럽풍 건물과 은근한 색채감으로 유명한 '쁘띠 샹플랭' (Petit Champlain) 거리에 들렸다. 이 골목은 아기자기한 편집숍, 레스토랑, 노천카페와 관광객들을 위한 기념품 숍들이 즐비하다. 세련된 간판과 문 앞에 걸어둔 화분들을 보면 특별히 살게 없더라도 안에 뭐가 있는지 괜스레 기웃거려보고 싶어진다.
골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웬 대형버스 하나가 앞에 나타났다. 안에 사람을 찍어내는 기계라도 있는 걸까. 빨간 깃발을 든 가이드를 선두로 버스는 관광객들을 끊임없이 뱉어 내었다. 아담해서 매력이 있다는 '쁘띠 (작은)' 골목이 한순간에 시장 골목이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은근한 수채화 색감으로 유명한 이 거리를 하필이면 형광색 등산복 차림으로 돌아다녔다. 퀘벡은 원래 관광도시라지만 ‘혹시 <도깨비>의 한류 때문에 중국인 관광객이 더 많아진 거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우리나라가 퀘벡시티의 경제에 기여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 덕을 좀 보기도 했다. <도깨비>에서 한국에서 퀘벡시티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마법의 문이 있는데 그 문이 바로 이 거리에 있다. 형광색 등산복 그들이 '어 여기다!' 하고 돌 담에 콕 박힌 빨간 문의 문고리를 잡고 사진을 찍고 있던 탓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모르고 지나가면 놓칠 만한 이 작은 문을 귀신같이 찾아 사진을 찍는 이들은 죄다 공유 하나쯤은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한, 중, 일 관광객들이었다.
반면 지나가는 서양인 관광객들은 도대체 '이 문이 뭐길래'하고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빛을 보고 깨달았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건축물과 풍경, 그리고 한국 멜로드라마 특유의 말랑말랑한 서정적 감성. 같은 여행을 하고 있지만 이 둘의 조합이 만들어낸 독특하고 몽환적인 퀘벡 시티의 분위기를 그들은 느낄 수 없다는 것을. 퀘벡 시티만의 감성이지만 정작 현지인은 느낄 수 없는 한국의 정서가 이곳에 있었다.
알면 보이고 모르면 절대 느낄 수 없는 이 감정은 내가 말로 전달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 눈에는 퀘벡 시티 랜드마크마다 도깨비 속 장면이 보였는데 그들에게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K-드라마를 즐기는데 ‘여행 갔을때 현지인은 모르는 숨겨진 감성을 느끼기 위해서’라는 뭔가 그럴싸한 멋진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