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벡인의 밥상 문화
퀘벡 시티의 역사도 물론 흥미로웠지만 국회의사당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건 사실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식사였다. 투어가 끝나니 정오가 되었다. ‘어디를 가야 맛있는 점심을 적당한 가격에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찰나, 가이드가 의원 식당에 가보라는 꿀팁을 주었다. 백 년도 넘는 깊은 역사의 의사당에서 점심까지 해결할수 있다니!
의원 초상화가 걸려있던 계단을 다시 걸어 내려왔다. 고급스러운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입구를 통과해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놀랍게도 고급 호텔 연회장 같은 내부가 나왔다. 나는 이 넓은 레스토랑의 유일한 손님이었다.
“아무 데나 편한데 앉으세요.”
친절한 웨이트리스의 안내에 따라 레스토랑을 쭈욱 훓었다. 유럽 왕실의 색이라는 남보라와 자주색 카펫 위를 위풍당당하게 밟고 지나, 그리고 금테가 둘러진 흰 기둥을 지나 창가 자리로 향했다. 의사당 앞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였다.
언제든 바로 앉을 수 있게 완벽히 세팅된 원탁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눈처럼 새하얗고 빳빳한 테이블보가 알록달록한 카펫과 대비되어 더욱 하얗게 빛났다. 이미 광이 나게 닦아놓은 식기 도구와 물컵은 금빛 샹들리에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가끔 드라마 속 재벌 2세가 연인을 위해 고급 레스토랑을 전세 낸 장면이 나올 때‘저 기분은 과연 어떨까’ 하고 상상한 적이 있는데 그 거만한 기분을 엉뚱하게 퀘벡 시티 국회의사당에서 느껴보았다.
“와인 하시겠습니까?”
오전이 이제 막 지난 시간이었는데 웨이트리스가 와인을 곁들일 건지 정중히 물어봤다. 중요한 안건이었다.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진지한 얼굴 또한 레스토랑보다는 회의장에 더 어울렸다. 내가 관광객이라서 일부러 물어본 걸까, 아니면 퀘벡에선 국회의원들도 점심에 와인을 곁들여 먹는 일이 흔한 것일까.
북미 도시에서는 우리나라처럼 편의점에서 술을 쉽게 찾을 수 없다. 술은 정해진 상점에서만 정해진 시간에 살 수 있다. 구매 후에도 종이백이나 검은 봉지 안에 음식 쓰레기 마냥 꽁꽁 숨기고 가야 한다. 그래도 도시마다 술에 대한 인식 차이가 있기는 한데 보수적인 영국 개신교도가 자리 잡은 북미 지역이 술에 대해 엄격한 편이라면 천주교 프랑스인이 뿌리내린 몬트리올과 퀘벡 지방은 술에 대해 더 너그러운 편인 듯했다 (퀘벡주에서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도 다른 주보다 한 살 어린 18살이다).
와인은 건너 뛰고 메인으로 버섯이 들어간 닭고기를 주문했다. 럭셔리한 레스토랑이니 그에 걸맞은 프리미엄이 붙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거품 없는 가격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프랑스 왕실의 상징인 백합 문양이 박힌 접시에 정갈히 담겨 나왔다. 맛은 특별하다기보다는 깔끔하고 만족스러웠다. 단 양이 좀 아쉬웠는데 대신 식기도구를 부담스럽게 많이 줬다. 스푼 두 개, 포크 두 개, 나이프도 두 개...(놀라운건 이 많은 식기 도구들을 다 한 번씩은 썼다는 것!)
단품을 시켰는데도 애피타이저로 수프와 식전빵이 딸려 나왔다. 밴쿠버에서는 시킨 음식만 달랑 나오는 반면에 몬트리올과 퀘벡 시티에서는 아무리 작은 식당이라도 애피타이저로 수프나 샐러드가 메인에 세트처럼 포함되어 함께 먹을 수 있었다. 마치 한식당에 가면 소고기를 구워 먹어도 밑반찬이 나오고 김치찌개를 시켜도 밑반찬이 나오는 것처럼. 아마 코스요리를 즐기는 프랑스 음식 문화의 영향이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풀코스 요리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최소한의 코스 형태를 지켜주는 수프 한 그릇에서 때로는 타협을 때로는 투쟁을 선택해 만들어진 퀘벡시티만의 식사 문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형적인 프랑스와도, 혹은 영미 도시와도 다른 퀘벡 시티만의 모습이다. 식전 빵, 애피타이저 그리고 메인 사이에 식기도구를 한 번씩 바꿔쓰는 것만으로도 평소보다 천천히 음미하며 먹게 되었다. 덕분에 간단한 음식이지만 귀족처럼 장소에 알맞은 분위기를 내며 품격 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사소한 지역별 차이를 몸소 직접 느끼며 먹으니 식사가 맛있기도 했지만 또한 재미있었다. 그러고보니 의원 식당이야말로 그 지역의 밥상 문화를 접하기에 최적화된 곳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