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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홍 돌고래 May 10. 2021

San Fran 02. 샌프란시스코의 언덕길 위에서

샌프란시스코는 언덕길이 많은 도시로 유명하다. 경사길 위에는 비슷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른 디자인의 복층 주택들이 서로 다닥다닥 포개져 있다. 20세기 초에 서민들 주거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렇게 지었다는데 벽간 소음이 들린다고 할 정도다. 이럴 거면 차라리 아파트를 짓는 게 낫지 않았을까. 어찌 됐든 이 집들 중 하나가 내 숙소였다. 집주인이 미리 일러준 대로 현관 매트 밑을 들춰 키를 찾아냈다.


전형적인 샌프란시스코 주택 스타일. 밝은 페인트로 칠해진 이 집들을 나는 솜사탕집이라고 불렀다.


문을 따고 들어간 곳에 샌프란시스코의 과거가 있었다. 검붉은색 고가구와 빛바랜 카펫도 20세기 유행하던 그대로 유지된 채로. 집주인은 인테리어에 일절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면 오래된 물건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편일까.


집은 세로로 긴 구조였다. 현관문 바로 옆이 거실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양벽이 옆집과 딱 붙어있기 때문에 햇빛이 들어올 자리는 도로 쪽에 난 현관 옆뿐이었다. 집 가장 안쪽에는 내가 지낼 방이 있었다.


인기척 없는 어두컴컴한 복도를 통과하면서 복도문을 슬며시 밀어봤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저 깊숙이서 지독한 쑥 타는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보이지 않는 집주인의 존재가 갑자기 확 다가왔다. 후다닥 문을 닫고 나에게 약속된 이방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침에 일어나니 부엌 식탁 위에 나를 위한 대용량 패밀리 사이즈 시리얼이 놓여있었다. 피넛 버터 캡틴 크런치와 시나몬 토스트 크런치 (과자에 가까운 시리얼). 뜻밖의 아이 입맛에 웃음이 나왔다. 아침으로는 달달한 캡틴 크런치를 먹고 저녁에는 몽롱한 기분을 즐기는 그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신기하게도 사흘 내내 집주인과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시티에서 마주치는 히피 인상의 캘리포니아인마다 혹시 내 집주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우리가 마주친다 해도 서로를 알아볼 수는 없었을 테지만.)


정차돼있는 트램에 매달려 사진을 찍는 관광객


오늘은 트램 (전차)을 타기 보기로 했다. 워낙에 관광 명물이기도 하지만 주민들에게도 유용한 교통수단이다. 샌프란시스코는 경사길이 많기 때문에 걸어갈만한 거리도 트램을 타게 될 수밖에 없을듯하다. 특히나 이런 무더위에는.


풍채 좋은 흑인 여자 운전사가 시원스럽게 트램을 몰았다. 검은 뿔테안경의 아시안 남자, 사이가 좋아 보이는 노부부, 특이하게도 카우보이 복장을 한 중년의 백인 남자 등 샌프란시스코 구석구석에 흩어져있던 다양한 인생들이 하루 일과를 시작하러 시내로 흘러들었다. 


&*@#$%^!!!!


뒤편에서 큰소리가 났다. 안경을 쓴 아시안 남자와 다른 한 남자 사이에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야? 열댓 개의 눈이 한꺼번에 그쪽으로 쏠렸다. 시비가 붙은 게 아니라 아시안 남자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비를 거는 남자는 무엇에 취했는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시안 남자는 그 남자가 투명 인간이라도 되듯이 애써 무시했다. 상대를 하지 않으면 제풀에 지칠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남자의 행패는 점점 심해졌다. 급기야 그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대며 싸움을 걸기 시작했다. 다시 보니 아시안 남자는 아예 얼어붙어버린 것 같았다. 우리 모두 가시방석에 앉아있었지만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나서질 않았다.


‘아, 누가 도와줘야 하는데... 무서운데 나라도 도와줘야 하나.’ 


그 순간 트램이 길 한가운데 급정거했다. 운전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겟 더 헬 아웃 오브 마이 트램!"


순간 정적이 흘렀다. 

설마 순순히 내리겠어? 그런데 웬일! 시끄럽던 트램 빌런은 단번에 온순한 양이 되어 찍소리 한번 하지 않고 사라졌다. 아니, 이게 이렇게 쉬운 일일 줄이야. 


그제서야 승객 모두 마음 놓고 우리의 히로를 향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상황을 바로 앞에서 주시하고 있던 카우보이 남자가 제일 열광적으로 손뼉을 쳤다. 우리의 환호 속에서 운전사는 당당히 운전대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트램도 그다음 정거장으로 이어갔다. 


아침부터 싸움을 목격해서일까.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지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왠지 이미 많은 것을 본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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