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계의 애플’과 ‘죽기 전에 꼭 먹어봐야 하는 빵’이 있다는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의 이미지를 이용한 뻔한 수식어였지만 나 또한 그것에 혹해 타르틴 베이커리로 향했다.
나는 게으르지만 먹는 일에 한해선 누구보다도 부지런한 사람이다. 아침부터 빵집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빵집은 나같은 부류로 인해 벌써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줄이 너무 길었다. 점점 더워져가는 햇살 아래 30분 남짓을 견딘 끝에 드디어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직원들과 북적북적한 손님들 사이에서 버터와 설탕 냄새가 풍겨 나왔다.
“왓 캔 아이 겟 유?”
이제 발을 막 들여놓은 나에게 직원이 물었다.
"어...그러니까..."
(탈락!)
아주 잠깐 우물쭈물 하는 사이 발언 기회가 다른 이에게 넘어갔다. 손님2는 나를 제치고 원하는 빵을 정답 외우듯이 또박또박 외쳤다.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도전의 눈빛이 분명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인기 있는 빵은 실시간으로 매진되어가는 중이었다.
당신이 거기서 무슨 빵을 먹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 있건 간에 당신 차례에 주문할 준비를 하고 있어라. 안 그러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걸까. 나 같은 손님을 위해 누군가가 위와 같은 후기를 써놓았다. 다급하게 직원을 다시 찾아 닥치는 대로 머리에 떠오르는 빵을 시켰다.
초콜렛 크루아상은 아주 빠른 속도로 내 앞에 대령 되었다. 바스락 베어 물었다. 입가에 얇은 빵 부스러기가 묻어났다. 겹겹이 쌓인 얇고 촉촉한 패스츄리와 진한 초콜릿이 입안에서 조화롭게 춤을 춘다. 빵을 입에 가져가는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빵이 사라지는 게 아쉽기 때문이다.
달콤함은 순식간에 끝났다. 빵을 다 먹으니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의자도 불편하고 인파 때문에 눈치도 보인다. 왠지 허탈하다. 빵이 맛있다고 그 경험이 반드시 멋진 것은 아닌가 보다.
그렇게 아침에는 짧지만 강렬했던 (그리고 피곤했던) 달콤함을, 오후에는 향기로우면서도 시큼한 커피를 찾아갔다. 하얀 배경에 쨍한 파란색의 심플한 로고의 간판이 산뜻하다. 커피계의 애플이라고 익히 들었지만 블루 보틀 커피를 마셔보기는 처음이었다. 커피계의 애플이라고 불리는 이유에는 깔끔한 로고도 한몫하지만 최상의 커피를 만든다는 철학이 뚜렷한 커피 메이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플랫 화이트를 즐겨먹는다. 라테보다는 진하고 아메리카노보다 고소한 커피 맛이 좋다. 플랫 화이트는 메뉴에 없었지만 바리스타가 알아서 만들어주었다. 가격에 비해 생각보다 작은 컵에 담겨 나왔다. 왠지 섭섭하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다.
"씁- 당연히 맛이 좋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거늘, 기대치가 높았던 탓인지 그 좋은 커피 맛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매장은 요즘 카페답지 않게 좁았다. 편의점처럼 서서 먹을수있는 작은 테이블뿐이었다. 물론 삼각 김밥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중이라면 모르겠으나 커피를 (서서) 홀짝이는 기분은 꽤 괜찮았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 줄을 서서 커피를 샀다. 그리고 스탠딩 테이블에 기대어 커피를 마셨다. 그 모습이 힙했다. 아, 여기는 샌프란시스코였지.블루 보틀은 커피 애호가면서 동시에 거물급 테크 투자자들이기도 한 동네 주민들(?)에게 투자를 받아서 성장한 기업이다. 이 나이 드신 분들 중에 애플이나 페이스북 본사 임원이 있을지도.
나는 나도 모르게 한국만의 ‘카페 문화’에 길들여져 있었던 걸까.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붐비는 시장 같은 빵집에서 빵만 먹고 탈탈 털고 나오기도, 서서 커피를 마시는 것도 뭔가 2% 아쉬웠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나 보다. 왜냐면 한국에 생긴 타르틴 베이커리도, 블루보틀 카페도 샌프란시스코 본점에 비해 더 크고 세련된 인테리어, 그리고 더 편안한 서비스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같은 브랜드인데 한국에서 경험하는 블루보틀과 타르틴 베이커리는 미묘한 차이로 '한국화' 되어있는 느낌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음식의 퀄리티'이라는 본질에 포커스를 맞추어 성공한 이 기업들이 한국 시장에서는 전체적인 포장과 구색이 맞추어지지 않으면 성공할수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어느새 커피는 바닥이 났다. 사실 별건 없지만 ‘커피계의 애플’과 ‘죽기 전에 꼭 먹어봐야 하는 빵’을 본토에서 먹어봤으니 제법 샌프란시스코스러운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뿌듯함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