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쫄쫄이를 입고...
요즘 아들이 집에서 입는 옷입니다. 검은색 쫄쫄이 내복.
주말에 뒹굴고 놀다가, 저는 서고 아들이 발밑에 누웠는데, 아들이 제 그림자가 되더군요. 재밌는 놀이가 생긴 거죠.
본격적으로 그림자놀이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걸어가면 그림자가 기어서 따라옵니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아들은 왼쪽으로 잽싸게 몸을 움직입니다. 제가 제자리 뛰기를 했더니, 아들은 배와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합니다. 나름 창의적이죠.
19세기 초에 프랑스 작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가 쓴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생각났습니다. 그림자를 팔아 부를 얻지만, 다름을 이유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사회에서 고립된다는 얘깁니다.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존재합니다. 그림자가 없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어둠 속에서만 머물러야 하죠.
아쿠시 코지가 열연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림자가 등장합니다. 오해가 있었던 두 중년 남자가 밤의 가로등 밑에서 서로의 그림자밟기를 하며, 그림자를 합치고 마음도 포갭니다.
영화 속 대사, "그림자와 그림자가 만나면 더 짙어질까요?"
정작 중요한 건, 명도가 아니라 짙어졌다고 믿는 미음, 그걸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무심했던 그림자가, 소설 속에선 인격이 되고, 영화 속에선 마음이 됐습니다.
아들이 제 그림자가 됐을 때, 기분이 좋았습니다. '나를 잘 따라와 줬으면 좋겠다. 내 인격과 내 마음을 잘 따라줬으면 좋겠다. 아들에게 내가 가로등 정도의 빛은 계속 돼줘야겠다. 그러려면 나도 고매한 인격과 따뜻한 마음을 지켜가야겠다' 또 하나 '잘 어울리는 검정 쫄쫄이 한 벌 더 사줘야겠다'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