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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gram Apr 25. 2022

5년간의 회사 생활을 마치며

지금 퇴사하는 중입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
...
T.S. Eliot


습관처럼 말하던 "퇴사"를 드디어 실현했다. 퇴사하기에 가장 좋다는 4월이었다. 거의 삼년만에 벚꽃 축제가 열렸고, 친구와 함께 점심시간에 벚꽃과 개나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꽃길만 걸으라는 하늘의 계시일까?"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즈려밟으며, 갑자기 긍정의 기운이 마구 솟아났다. 퇴사는 사람을 바꾸어 놓았다. 옆에 있던 친구가 '왜 저래?'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으나 개의치 않았다. 나는 그 날 꽃길이 펼쳐진 윤중로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a.k.a. 퇴사자였으니까^^. 


이 구역의 금쪽이

내가 회사 내 금쪽이가 아닐까 싶을만큼, 감정이 요동쳤던 지난 5년이었다. 나의 마인드셋을 바꾸어보기도 했고, 그것또한 여의치 않을 때는 부서도 옮겨가며 셀프 금쪽처방을 내렸다. 마음이 불편한 상태를 잘 견디지 못하는 까닭에 인내심을 발동하기 보다는 발버둥을 치는 쪽이었다. 이력서 업데이트는 일상이었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면 채용 사이트에 들어가 구인공고를 뒤졌다. 때 마침 어찌내 마음을 알았는지 헤드헌터에게 연락이 오면, 그 즉시 지원서를 충동적으로 제출하고, 면접을 봤다. 코로나 시국의 유일한 장점인 비대면 면접으로 휴가를 쓰지 않고도 점심 시간 등을 활용하여 채용 프로세스를 밟을 수 있엇다.  


지난 4월 이맘 때 나는 여의도 윤중로가 아닌 성모병원을 나오며 세찬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벚꽃잎을 바라보았다. 스트레스와의 기싸움에서 져버려 쓰러지고 응급실에 실려간 다음날이었다. 연차를 내고 여러가지 검사를 받았다. 온 몸에 기운이 없었지만 나의 업무대체자는 다음 날의 나였기에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으로 업무를 보고 제휴사 담당직원과 통화를 했다. 


누군가 나의 단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판단력'이라고 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사리 붙은 모 핀테크 회사에 최종합격해서 연봉 협상도 마치고 회사에 퇴사 통보까지 하고서는 무슨 미련인지 번복을 하고 다니던 회사에 남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새 회사 첫 출근일로 예정되었던 즈음 눈을 떠보니 병원 응급실이었고, 내가 이러려고 남았나하는 생각에 어쩐지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엘리엇의 시처럼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번아웃된 몸뚱이를 이끌고 당시 연중에 가장 큰 온/오프라인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말 그대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듯 실적 반등을 위한 눈물의 쇼타임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팀장님이 나의 건강을 신경써주었지만, 프로모션 준비 일정이 너무나 타이트했고 대체할 사람이 없는 것이 내게 주어진 현실이었다.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는 밈이 떠올랐다. 


인간의 생명력은 역시나 질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몇 개의 프로모션을 운영하고, 병원에 가서 검진도 받다보니 혈압과 맥박도 어느정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라일락이 지고 여름이 왔고, 몇 번의 폭우가 내리더니 이내 버버리 코트를 꺼내입는 계절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겨울, 봄. 정확히 1년 만에 다시 나는 퇴사를 선언했다. 이번에는 진짜라는 말을 덧붙였다. 작년의 퇴사 난동(?)이 예방 주사가 되었는지 비교적 덤덤하게 받아들여졌다. 


4월은 잔인한 달 
 

먼저 회사를 떠난 동기들은 나의 퇴사 번복을 의아해했다. 그 지긋지긋한 회사를 다시 제 발로 돌아가다니 제정신이냐고 묻는 친구들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미련이 많이 남았던 것 같다. 대학 시절부터 내가 가장 가고 싶어했던 회사였고, 당시 기준으로 4년 간 다니면서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커리어적으로도 현 회사에서 더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조금만 더 하면 성과도 잘 받고 진급도 빨리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회비용에 대한 아쉬움들이 나를 붙잡았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


탈출하려는 나를 붙들어 맨 말은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는 말이었다. 어차피 다 그렇게 살기에 익숙한 이 곳에서 너의 몫을 챙기면 그 뿐이라는 말은 꽤나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그래, 스트레스 없는 회사원이 어디있으랴. 그리고 다들 1인분의 몫을 훌쩍 넘어 숨이 턱턱 막히도록 일을 하고 있는데 내가 뭐라고 유난일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나도 내가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려했다. 유의미한 경험들을 쌓고 남들보다 더 빨리 승진을 해서 더 안정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나의 새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먼 조상 중에 유목민이 있음이 분명했다. 나는 도저히 정착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회사 생활에 뼈를 묻어야겠다는 생각이 비좁은 방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대학입시이후 몇 년에 한 번씩 인생의 다음 관문을 통과해오던 습성 때문일지, 먼 조상의 유랑 DNA때문인지, 아니면 금쪽 처방의 약효가 다해서인지 퇴사 직전 몇 달간은 마음이 몹시도 괴로웠다. 내가 그린 안정적 미래의 틀 속에 스스로 나를 가두어 두고 있다는 생각, 회사를 열심히 다니는 현재의 내 모습이 나의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최선일까 하는 의구심이 나를 괴롭게 했다. 몇 년전에 회사를 다니며 깨쳤던 것들을 소모하고 있다고 느꼈고, into the unknown, 미지의 세상으로 떠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마음 속 깊이 묻어둔 어떤 감정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몇 개의 계절 동안 나는 마치 헤어지기 전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회사생활에 온 마음을 다했다. 그렇게 나는 다니던 회사와 이별하는 중이었다. 막상 퇴사를 선언하니 참으로 후련했다. 전처럼 미련이 남지 않았다. 흩날리는 벚꽃잎을 보며 오랜만에 정말 미세먼지 한 톨 없는 맑은 하늘을 마주했을 때처럼 개운한 마음이 들었다. 회사 앞에서 벚꽃 축제가 열린다고 마냥 좋아하던 5년 전 신입시절의 나, 작년 병원문을 나오자마자 강풍에 벚꽃 싸대기를 맞던 나,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마음으로 이 봄을 온전히 누리고 있는 나. 다사다난 했던 5년의 시간 속의 내가 있었다. 죽은 것 같은 땅에 다시 온기가 불어졌고, 굳은 몸에 기지개를 켜며 다시 움직여야할 때였다. 고통스럽더라도 결단을 내려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내 마음은 이제 답을 알고 있었다.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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