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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gram Mar 09. 2020

대기업 마케터의 삶

'인하우스 광고주'로서의 커리어

대기업 마케팅 기획 업무는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실제 Sales를 일으키는 마케팅과, 그 마케팅이 잘 되고 있다고 증명하는 일. 전자가 속력을 높이는 일이라면, 후자는 방향을 정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둘 다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샌가 후자에 매몰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케팅 부서가 집행하는 예산이 크기 때문에(우리는 본부 예산의 절반 이상을 쓰고 있다), 그 예산을 제대로 효율적으로 쓰고 있는건지, 전사 비용율을 높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엄청난 태클이 들어온다. 실적이 안나오면 고객 유입이 적은 것 같다는 불만이 제기되고, 광고/프로모션을 추가 운영해서 비용이 많아지면 효과성이 없는 것 아니냐며 연락이 온다. 거의 월별, 분기마다 마케팅 채널, 매체별로 효율 대시보드를 만들어야하고, 어떤 날은 하루종일 방어 논리를 짜느라 밤늦게까지 야근하다가 실제 운영 업무는 아예 손을 못댄 날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마케터인가, 그냥 보고서 쓰는 기계인가 하는 회의감도 든다. 그 와중에 우리도 뭔가 새로운 기획을 해야하지 않냐는 얘기가 들린다.


나는 현재 금융사에서 온라인 마케팅 기획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주 업무는 온라인 마케팅이라, 흔히 '광고주'라고 불리는 역할을 맡았다. 인터넷상에 도는 짤에 나오는 광고주는 '갑질'의 대표주자다.



'OO님 이거 내일 오전까지 세팅해주세요'
'XX님 늦은 시간 죄송하지만, 내일 오전까지 가능할까요? 감사합니다
저번 달 동 영업일 대비 유입량이 줄었는데 A 매체 입찰 단가 흐름좀 분석해주세요



광고주가 흔히 대행사에 요청하는 말들이다. 왠지 일은 대행사가 다하고, 광고주가 하는 일은 없어보인다!


광고기획부터 콘텐츠 제작, 퍼포먼스 마케팅을 위한 캠페인 세팅부터 운영, 보고서 작성, 비용 처리까지 다 대행사가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 뭐, 거의 그렇긴 하다. 일단 인정하고 이 글을 시작한다.




대기업 마케터는 대체 뭘 하고 있나?


사실 이 점이 광고주로서 대기업 마케팅 업무를 하면서 생기는 커리어 고민의 시작인 점이기도 하다. 흔히 회사안에서 다른 팀 사람들도 광고는 대행사가 다 해준다고 말한다. 광고업무를 한다고 하면, 거의 광고기획사나 대행사(Agency)를 떠올린다. 그들이 실제로 제작부터 운영, 결과 리뷰까지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어쩔 때는 내부인력인 나보다 더 우리 상품을 잘 아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나는 의문이 생긴다. 일은 대행사가 다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바쁜걸까, 어째서 52시간제를 겨우겨우 지키며 매일 밤 야근하는 걸까. 현업에 있으면서도 가끔은 구글에 '마케팅 커리어', '대기업 마케팅 커리어' 를 검색해보곤 한다. 그러나 검색 결과는 딱히 별게 없다. 그래서 내 업무에 대해 정리도 해볼겸 직접 작성해보기로 했다. 비록 연차가 얼마 안되었지만, 인터넷에 나온 모든 검색 결과는 거의 다 본 것 같으니 종합 써머리 정도로서 의미를 찾기로 하자. 자문자답으로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정리헤보려 한다.


마케터의 일


일단 B2C 와 B2B로 나눠봐야할 것 같다. 나는 B2C쪽에 있기도 하고, 이 글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B2C에 관심이 있을 듯하니 전자에 초점을 두고 의견을 썼다.


1. 장기적, 전사 관점에서 나의 상품을 바라본다.


당장의 상품 운영 현황도 중요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상품 포트폴리오 관리도 필요하다. 우리의 전략 상품이 무엇이고, 향후 성장성을 어떻게 가져가야할지 마케팅 계획에 반영시켜야 한다. 상품의 연간 목표량을 설정하고, 월별로 일별로 얼만큼 실적을 달성해야 하는지 채널별로 항목별로 꼼꼼히 설정한다. 그리고 그 계획에 맞춰 운영의 큰 방향성이 결정되고, 목표 달성을 위한 전술적 업무들을 세팅하게 된다.


또한 전사차원에서 이슈가 발생하면 그에 대응해야 한다. 전사적으로 비용체계를 점검한다거나, 법적 측면에서 이슈가 없는지에 대한 감사 요구에도 응답해야 한다. 또, 소비자의 의견을 반영하여 상품을 운영하고 있는지도 볼 때가 있다. 수시로 도착하는 취합자료엔 내 상품 관련 부분을 채워줘야한다. (내가 이 업무를 맡은지 3개월이 되었건, 1년이 되었건 주로 3년치 월별자료를 요구 받는다!)



2. 광고 대행사와의 Co-work을 주도한다.


검색 광고 비중을 줄이고 배너, 제휴 광고의 비중을 높일 계획을 세웠다고 치자. 기존 회원의 리텐션 확대만으로는 올해 취급 목표를 달성할 수 없기에 신규 고객 확보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push 채널인 배너광고를 늘림과 동시에, 고객 노출이 많은 신규 매체와의 제휴를 넓히고, 가능하다면 그들의 DB도 활용해야하는 상황이다. 단, 전년대비 예산이 30% 삭감되었기에 효율을 30% 이상 개선하여 저비용 구조로 Shift해야하는 어려운 미션을 달성해야 한다.


우선 대행사에만 이 모든 문제를 맡길 수 없다. 우리 고객의 특성에 맞으면서도, 상부에서 선호할만한 제휴처를 먼저 발굴해야한다. 제안한 영역에서 실적이 잘나오면 다행이지만, 안나오면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시뮬레이션과 TEST는 필수다. TEST도 꼭 비교군, 대조군을 세워 실험법으로 진행해야하고, 어떤 영역을 어떻게 세팅해서 무슨 결과를 얻고 싶은지 구성해야 한다. 통계학적 의미가 있는지 확신은 없지만.. 우선은 이렇게라도 분석을 시도해보기로 한다!



3. 내부의 언어로 우리의 성과를 해석한다.


마케팅 기획이라는 단어는 많은 것을 포괄한다. 난 그 중 상품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고, 주 채널로 온라인 검색, 배너, 영상 광고 등의 운영 관리를 담당하고 있으니, 이 부분을 참고해주시길 바란다.


온라인 광고의 용어는 적응하는데 한 달 정도 걸린다. CTR, CVR, CPA, CPM, PTR 등 영어 약자로 점철되어 있고, 그 지표들은 마케팅 부서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낯선 용어다. (온라인 광고 업무를 하지 않는다면 마케팅 업무를 하더라도 모를 수 있다) 또 내부에서는 주로 고객을 모집하는 앞단의 내용보다는 모객 이후의 취급 연동에 더욱 신경쓰고 있기 때문에, 주된 관심 포인트도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우리가 확보한 DB가 취급까지 연결이 잘 되는가, 아닌가에 한정된다. 또 뜬금없이 상부에서 SNS채널이 잘되고 있냐고 물어볼 때도 있다. 우리 상품 특성상 브랜딩보다는 Sales 채널에 투자하는 것이 더 중요한데, 갑자기 SNS를 물어보니 당황스럽다. 일단 기존 운영하던 채널 중 SNS 채널에 나가는 배너들을 모아 그에 대한 자료를 정제해서 보고서를 만든다.




대기업 마케터는 어떤 커리어를 쌓을까


애석하게도 광고주로서의 커리어빌딩에 대 베스트 프랙티스를 찾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기업마다 문화가 다르겠지만, 내가 속한 회사는 인사이동이 정말 많다. 광고 업무를 하다가 UX 업무를 하고, 갑자기 상품전략 업무를 맡기도 한다. 그저 서로 다른 영역을 나눠 맡았을 뿐, 사실은 보고서를 통해 상부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게 이 조직의 숙명이기 때문인 듯 싶다. 그래도 그 중에 케이스를 나눠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본부 내 다른 업무를 경험한다.

'이젠 마케팅을 했으니 상품 운영을 해봐야지~?', '퍼포먼스 광고를 했으니 개발도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걸?!', 'OO씨는 크리에이티브하니까 UX를 운영해보자!' 등 약간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유들로 타 업무를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놀랍게도 그러나 한달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들 새 업무에 적응하며 잘 산다. 회사원이란 기본적으로 제너럴리스트적 측면이 강하기에 가능한 것 같다.

 

2. 본부 외 타 사업부에서 마케팅 업무를 이어간다

자의일 경우, '이 상품 해봤으니 저 상품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 타의일 경우 'A 상품 런칭에 성공했으니 B도 살려봐라'는 기대감에서 연결되는 커리어라 볼 수 있다. 그나마 이제, 회사안에서 고정된 입지를 다져나가는 케이스라 볼 수 있으나, 윗 직급으로 올라갈수록 직무와의 연계성은 오히려 더 떨어지는 것 같다. 대기업 관리자로서의 역량은 유관부서의 업무까지 이해도가 어느정도 있는지와 상부의 니즈와 의사결정을 잘 보조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추정해본다.


3. 타사로 이직한다

많은 주니어들의 꿈이다. 이 회사에서 소진되고 있다고 느낄수록, 심신이 지쳐갈수록 이 둥지를 떠나보고 싶은 욕구가 드는 법이다. 좀 더 인기 많은 상품, 고객들의 관심이 집중된 플랫폼을 향해 큰 현재까지의 경력을 정리하여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 타 대기업이 되었던, 스타트업이 되었던 좀 더 Hot한 비즈니스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이 내 주변 사람들의 트렌드다. 마케터로서의 커리어를 길게보면 여러 유관 산업에서의 경험을 늘리고, 레벨업할 수 있는 다이나믹한 기회들을 스스로 만들어가는게 현명한 것 같기도 하다. 다만, 현 직장에서 적응될대로 되어버렸고, 집과 회사와의 거리, 힘들 때 도움이 되는 동기들 등 업무 외적 요소들을 고민하다 이직을 주저하는 경우도 많다.





금융사에서 마케팅업무를 한다는 것


흔히 마케팅을 하려면 소비재로 가라고 한다. P&G, 로레알, 코카콜라 등 화장품이나 생활소비재 기업이 마케팅 사관학교로 알려져 있는데, 브랜드 매니저로서 A 부터 Z까지 상품 전반에 대한 오너십을 가지고 업무 수행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위 브랜드 들은 마케팅의 파워가 강할 수 밖에 없다. 상품 특성이 비슷비슷하고, 구매를 결정하게되는 요인 중 브랜딩이 가장 큰 요소이기 때문이다. 마케터의 역량이  발휘되어야 결국 세일즈도 잘 되고, 회사도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마케터의 권한도 가장 큰 편이고 해당 커리어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는 구조이다.


카드사와 같은 금융사나 통신사 등도 그 다음으로 언급되는 편이다. 소비재보다는 구매결정요인이 가격에 좀 더 포커싱 되어 있기에 마케터의 역량과 동시에 상품의 구조적인 특징 또한 매우 중요하다. 상품력이 강세라면 그것을 얼마나 Maximize하여 전달하는지가 마케터의 과제고, 상품력이 열세라면 그것을 극복해낼만한 브랜딩 요소들와 타겟팅을 고려해야한다. 대개의 경우 후자에 속하는 듯 하고, 고관여 상품에서 소비자의 지갑에서 기꺼이 돈을 더 내도록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다만 금융사, 통신사의 마케터들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방대한 데이터를 핸들링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비즈니스 모델이 거의 전산으로 해결 가능하고, Digital을 모토로 점점 비대면 영업이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있기 때문에, 데이터 수집부터 우선 용이하다. 금융사에서는 주로 SQL과 SAS를 통해 데이터를 분석한다. (R이나 파이썬은 일단 내 주변 마케터들은 잘 쓰지 않는다.) 


입사할 때는 프로그램을 써본 적 없어도, 선배들이 만들어둔 쿼리를 도제식으로 전수받으며 데이터 분석의 zero to one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 엑셀 vlookup을 배웠던 심정으로 하나하나 해보면서, 고객 Seg를 나눠보고, 매체를 분류해보고, 상품별/채널별로 실적을 산출해낸다. 그리고 부족한 영역을 drop할지 개선시킬지 각종 흐름과 전략 방향을 고려하여 결정한 뒤, 세부적인 마케팅 방안 (ex. 성장시킬 부문에서의 프로모션 등)을 강구해낸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하여 실적을 높여도 마케터의 공으로 모두 돌아오지는 못한다.  금융사는 결국 수익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마케팅은 결국 비용의 측면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강하다.



제너럴리스트의 숙명


마케팅은 어찌보면 누구나 금방 배워서 할 수 있어 보이는 업무다. 규칙과 기술적 측면보다는 고객의 반응을 살피며 시장에 대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실함과 센스와 같이 정성적인 역량이 요구되다보니 진입장벽이 낮다. 그러나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마케팅은 우선 유관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상당히, 아주 상당히 많다. 내부적으로는 상품, 영업, 전략, 관리부서, 구매부서, 감사, 소비자보호센터 등과 엮여있고, 외부로는 광고대행사, 매체사, 일반 제휴를 위한 콜드콜까지 외연이 정말 넓다. 그러면서도 최신 마케팅 트렌드를 놓쳐선 안되고, 전통적 STP, 4P에 디지털마케터로서 Tech Savvy한 면모까지 갖춰야 한다. 바쁘다.


마케팅 업무는 특정 분야에서 스페셜한 사람보다는 제너럴리스트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전반적 영역에서 고루 레벨이 높아야 이 업무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늘 부족함을 갈구하고 끊임없이 성장을 향해 투자하고 시간을 쏟는 사람이라면 적성에 잘 맞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성장을 멈추고 싶을 때도 있고, 커뮤니케이션에서 해방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언제 나의 직무가 바뀔지 두려움을 안고 있는 걸 보면 아직은 이 업무에 대한 애착이 있는 것 같다.  마케팅 기획을 하는 동안은 삶의 다양한 경험을 즐기고, 다방면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제너럴리스트의 삶에 충실하기로 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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