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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구마깡 Apr 17. 2024

예견된 국민연금이 버린 세대 1편

삼성전자 개성공단 캠퍼스의 리 대리 -21-

커피는 이제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인스터트 가루가 뿜었던 향은 날아간 지 오래이고, 컵 안쪽표면에 수분이 날아가 설탕과 함께 들러붙은 커피 찌꺼기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훌륭한 커피라도 시간이 지난 커피는 개수대 구멍으로 향할 뿐이다. 시간이 지난 모든 훌륭한 음식은 그렇다. 심지어 오래된 국가도 그럴 수 있다. 뜨거운 물과 새로운 원두의 투입이 없으면 개수대로 향할 뿐이다. 하지만 컨테이너 박스로 만들어진 사무실 안에는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살짝 상기된 리 대리 때문일 수도 있다.


"허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마세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요?" 노 전무가 리 대리의 표정을 보고 뜸을 들이며 말했다. "지금 말은 오프 더 레코드로 알고 있을게요." 리 대리가 바로 대답한다.

"암, 그렇고 말고요." 노 전무가 끄덕인다. "정말 사람이 없어서 말해 봤어요."

"강성대국을 만들기 위한 우리 조선도 사람 없기는 매 마찬가지요." 리 대리는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고지식한 그로서는 이 얘기를 최대한 얼른 마무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네. 실례를 범했습니다." 노 전무도 낌새를 알아차리고 더 이상 분위기를 서먹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사과했다.


상황이 누그러지자 리 대리는 한편으론 궁금했다. *북한이 사람 없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남한보다 상황이 더안 좋기도 했다. 부유한 남한이야, 중국이나 인도, 동남아 등 전 세계에서 일하러 올 사람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난한 북한에서는 이들에게 줄 임금은 커녕 인민들에게도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한이 심각한 초저출산율을 겪고 있다는 점은 익히 들었지만 그 얘기가 나온 지 30년도 더 됐고 그 후로 어떻게 변했을까 짐작이 잘 안 갔다.


"오랫동안 일하는 반장님도 그렇고, 남조선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워낙 복잡다단해서 한 가지로 명확하게 설명하긴 그렇네요." 노 전무는 어디서부터 설명할지 막막했다.


"음... 몇 십 년 전부터 정치인들이 나쁜 새끼들이었어요. 자기 차례가 아니라고 인구가 줄어들 조짐을 이미 보이고 있는데 외면하고 선심성 부동산 띄우기 정책이나 기업만을 생각해서 결혼/가족계획 같은 건 개개인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내비뒀죠." 노 전무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리 대리는 서슴없이 자국 정치를 욕하는 남한 사람들이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다른 잘 사는 나라도 같은 일을 겪고 있지만, 어떻게든 막으려고 최우선순위로 결혼, 가족 계획, 기업-가정 양립을 두었는데, 이 놈의 국회의원들은 미국처럼 이민자들을 많이 받아서 해결하면 된다라고 말장난으로 몇 년을 우려먹었죠. 근데 미국이랑 우리랑 끌어들일 수 있는 인력풀이 같나요? 게다가 사회는 국내에서 교육을 받고, 원래 있던 직장인들과 이질감 없이 어우러지고 협력할 수 있는 한국인이 있어야 생산성이 착착 나오지. 일 잘하는 외국인도 있지만, 돈 많이 벌면 결국 지 나라로 돌아갑죠. 이민 정책을 제대로 세운 것도 아니고, 그렇게 몇 십 년을 허송세월로 보내다 보니 이제 진짜 일할 젊은이들이 없소." 노 전무는 가슴팍에 꽂아둔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리 대리는 - 와이셔츠에 담배 냄새가 배면 어쩌나, 아내도 싫어하는데 - 생각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옛날보다 우리나라에 방문하는 해외 관광객이나 젊은 사람들도 많이 줄었죠." 담배에 불을 붙인 노 전무는 이어서 말했다. "K-POP이니, K-드라마이니 한류도 다 젊은이들이 어느 정도 있어야 돌아가고 자생하고 발전하는 건데 그걸 사랑하고 소비하는 자국 사람들이 없으니 점점 하향세로 가고... 그러니 외국인들한테 매력이 있나? 발길이 점점 끊긴 거죠. 거기서 끝나면 다행인데, 전방위로 경제 활력이 죽어가고 있으니... 이제 한국은 저 앞에 활짝 열린 관짝으로 걸어가고 있는 형국이요." 노 전무는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매캐한 냄새가 사무실에 가득했지만, 리 대리는 이제 좀 익숙해졌다.


"이거 아쇼? 이번에 선거가 곧 있는데, 나 같이 손주 있는 늙은이는 이번에 손주를 위해 투표할 거요. 요새 자식도 가져본 적 없는 놈들이 난리치는 꼴을 도저히 봐줄 수 없어서 내 이번엔 투표를 꼭 하려고요."



* 21년 북한 출산율은 1.79명으로 역시 하향세를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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