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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tobadesign Apr 30. 2024

소란 속 안도감, 킷사텐 란부르

도쿄 킷사텐 일기


신주쿠역 동쪽 출구에서 나와 쭉 뻗어 있는 거리를 좋아한다. 그 길에는 참새 방앗간처럼 드나들던 키노쿠니야서점이 있고 쇼윈도에 맨날 감탄하는 이세탄백화점이 있고 늘 발길이 저절로 향하는 무인양품이 있다. 그리고 (주로 화장실로 이용한) 쇼핑몰 마루이가 있고 하얀 박스가 달린 자전거가 주차된 사거리 파출소가 있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구점 세카이도가 있다. 또 (조금 곁길로 새면) 늘 그리운 신주쿠교엔이 있고 그동안 도쿄도청이라고 착각했던 시계탑이 있고 매일 아침 햇살을 받으며 향하던 일본어 학교가 있다.

신주쿠역 개찰구에서 빠져나와 마루노우치선 쪽으로 가다가 옆으로 빠져 계단을 오르다 이 모든 곳들이 모여 있는 길이 조금씩 보이면 이상한 안도감에 사로잡힌다. 지도를 보고 있어도 늘 반대로 가는 길치에 방향치이기 때문에 조금만 곁길로 새어도 여전히 헛갈리고 갈 때마다 기웃거리지만, 그 큰길만은 내가 아는 가장 안심하는 길이다.


신주쿠는 어떤 때는 나를 미아로 만들었고 어떤 때는 일상의 중심 안에 있었다. 도쿄에서 지내는 내내 이곳이 목적지였고 출발지였다. 그러니 내 안의 도쿄에서 신주쿠는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오피스 건물이 많은 서쪽 출구 쪽보다 복작복작한 동쪽 출구 쪽을 더 좋아하는 건, 그쪽에서 먹고 마시고 떠들썩한 생활감이 더 많이 느껴져서일 것이다. 늘 사람으로 넘쳐나지만 늘 언제나 혼자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 동네. 어쩌면 누구와 함께 걸었던 기억보다 수많은 사람을 비켜가며 혼자 걸었던 기억이 더 많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신주쿠에서 느끼는 안도감 안에는 킷사텐 란부르가 있다.

란부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도쿄를 떠나 한국에 들어온 이후였다(킨츠기도 그렇고 그때는 뭐 하고 이제 와서...꼭 떠나야 소중함을 안다). 한창 번역가 데뷔를 위해 이곳저곳 기획서를 보내던 시기였고, 운 좋게 한 출판사와 연결이 되어 출간 검토 중인 책의 리뷰라는 걸 맡게 되었다. 리뷰는 출판사에서 외서를 검토할 때 번역가에게 의뢰해 이 책이 어떤 내용이고 뭐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을 정리한 보고서와 같은 문서를 말한다. 일주일 정도 되는 기간 안에 한 권의 책을 읽고 만들어야 하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어떨 때는 고역이지만) 할 때마다 내가 국내에 나올지 모를 책의 첫 독자라고 생각하면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일로도 연결될 수 있었으니.

어쨌든 그 책의 리뷰를 끝내고 나는 도쿄에 갈 예정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그 책이 해외 판권 판매 불가라는 연락을 갑자기 받아 출판사 쪽에서 저자를 만나고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작가님과 만나게 되었고 그때 작가님이 약속 장소로 정한 곳이 킷사텐 란부르였다.


꽤 오래전에 찍은 킷사텐 란부르. 구도도 이상하고 틀어졌지만 가장 좋아하는 사진.


그전까지 나는 신주쿠에 킷사텐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복작복작하고 건물이 삐까번쩍 있는 곳에 킷사텐? 사실 신주쿠는 골목골목에 킷사텐이 참 많은데 그걸 몰랐던 것이다(관심이 없었던 건지도). 원래 등잔밑이 어두운 법이고 떠나고 나면 아쉬운 법이다.


작가님과의 약속이 있던 날, 킷사텐 란부르로 향했다. 일단 나는 두 가지 사실에 황당했다. 첫 번째는 신주쿠 빔스에 가려고 수도 없이 많이 다니던 길에 있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그 외관이 내가 좋아하는 아치형에 빨간 벽돌이었다는 것이다. 내 눈은 도대체 뭘 보고 다녔을까?

점원의 안내를 받아 지하로 향했다.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갈 때마다 바깥세상과는 단절되는 느낌. 그리고 펼쳐진 광경은 무어라고 할까, 처음 경험해 보는 류의 것이었다. 계단으로 내려와 입구로 들어서자 또 하나의 부채꼴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고 모든 공간이 한눈에 쫙 펼쳐졌다. 마치 19세기 영화에 나올법한 저택의 계단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볼 듯한 위치에 내가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이 처음 경험하는 낯설면서도 약간 들뜨게 만드는 이 느낌은 뭐지?



적갈색 스트라이프 원단의 의자도 나무 테이블도 벽의 테라코타도 빈티지한 바닥 타일도 지금 시대의 것이 아닌 듯 독특했다. 일본식으로 말하면 쇼와시대 어느 시점에 그대로 발을 들였다고 할까. 화려하면서도 소박하면서도 뭔가 노스텔직하면서도...어쨌든 수많은 형용사들이 교차했다. 마음속으로는 입을 떡 벌린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나는 미팅 때문에 왔다. 정신를 차려야 했다. 온몸에서 수많은 느낌들이 향연을 펼치는데 미팅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앉아 있으려니 커피 한 잔의 시간이 더디게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미팅을 하면서 중간중간 킷사텐 안을 눈으로 좇았다. 한적한 공간 곳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원고나 서류를 보며 미팅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큰 서점이 근처에 있어서일까? 혹은 출판사가 근처에 있는 걸까? 킷사텐 란부르에서 오전 시간에 미팅하는 출판 관계자가 많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어딘가에서 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도쿄에 갈 때마다, 신주쿠에 갈 때마다 란부르로 향한다. 오전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미트소스 스파게티를 먹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다시 신주쿠 거리를 걷는다. 설령 시간이 없어 가지 못하더라고 그 앞을 지나며 사진이라도 찍는다. 그것만으로도 신주쿠 안에서 안심감을 얻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자꾸만 변하는 신주쿠가 낯설지 않은 공간이 되니까. 비록 란부르를 찾아가는 길을 매번 헛갈려 골목마다 기웃거린다고 해도.


커피가 유별나게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그 공간에서는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안도감, 편안함을 느껴진다. 어제의 소란스러움과 흥청망청한 분위기는 싹 씻겨 나간 조용한 신주쿠에서 킷사텐에 앉아 사람들이 조용조용 미팅하고 업무를 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그들 틈에 끼어서 미팅하고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서는 늘 그들만의 오라가 느껴져 멀리 있어도 자꾸만 그 사이에 끼고 싶어진다. 나도 책 만드는 사람이면서 말이다.)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자가 아니라 이곳에서 삶을 꾸려가며 일상을 보내고 싶어 진다.



요즘의 나는 좋아하는 동네에 좋아하는 킷사텐 하나쯤은 만들어두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도 그 장소에 가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 그것만으로도 도망칠 명분이 생기니까. 비록 바로 갈 수 없을지라도 순간순간이 팍팍할 때 도망칠 구석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으로 일상에 조금은 숨통이 트인다는 걸 아주 늦게야 깨달았다. 그것이 나를 돌보는 일로도 연결된다는 것도. 그래서 도쿄에 가면 몇 시간이고 동네를 걷고 킷사텐의 문을 연다. 예전보다는 조금 대담해진 용기를 안고.

그리고 좋아하는 곳이 될 만한 킷사텐을 찾아다니는 일이 지금은 여행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나의 킷사텐 덕질은 어쩌면 란부르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잔의 커피가, 공간이 주는 힘이 참 크다.


+


참, 그래서 그 책은 내가 번역하게 되었느냐고? 몇 번의 메일과 그날의 미팅 그리고 작가님의 노력으로 해외 판권 불가 원칙은 해결되었지만, 판권 경쟁이 붙어 선인세를 높게 부른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하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당시 나는 그렇게 번역가 데뷔의 길을 또 한 번 놓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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