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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tobadesign May 06. 2024

힘 빼기가 무엇인가요?

 애씀을 애쓰지 않습니다 vol.1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나는 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단어를 가지고 이런 목차로 이런 글을 쓰겠다며 누군가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문득 이건 꿈인데 나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유는 있다. 분명 잠들기 직전까지 또 다른 연재인「도쿄 킷사텐 일기」의 글을 정신없이 썼기 때문일 것이다. 애쓰지 않겠다고 하면서 결국 꿈에도 나올 정도로 애쓰고 말았다.




번역가를 준비하면서 번역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입문반부터 실전반까지 하게 되면 거의 1년은 걸리는 코스였다. 도쿄로 유학을 가기 전에 이 과정의 입문반 시험을 보았다가 떨어졌고 '그럼 그렇지.' 하면서 도쿄로 향했다. 그리고 돌아온 뒤 다시 시험을 보았을 때는 합격.  다른 건 몰라도 시험에서 떨어졌다 붙은 만큼의 성장은 일본에서 이룬 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숙제에 치여 살던 입문반을 지나 시험을 보고 실전반에 올라갔다. 실전반 마지막 수업에는 작은 시상식이 열렸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이 생각했을 때 열심히 한 사람들 몇몇에게 이름을 붙여 상을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가장 마지막 상인 열정 상(아마 그랬을 것이다)에 이름이 불렸다. 번역을 가장 잘해서 주는 상은 아니었고, 열정이 가장 많이 보이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었던 것 같다. 

부상도 있었는데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 가운데 그 사람이 번역하면 좋을 법한 장르의 책을 선물해 주었다. 면지에 한가득 적힌 코멘트와 함께. 내가 받은 책은 수학과 관련된 책이었다. 전문서가 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셨던 듯했고 나는 그때 디자인서 번역가를 목표로 하고 있었으니 어떻게 보면 잘 맞아떨어졌을 수도 있다. 상을 주며 선생님이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하나 님은 로또에 당첨되어도 계속 번역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로또에 당첨돼도 번역을 하고 있을 것 같다니. 상상해 보면 정말 그럴 것도 같으니 부정은 하지 않겠지만(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다! 로또 당첨!), 선생님 눈에는 그 정도로 내가 번역에 열정이 있는 사람으로 보였던가 보다.

나중에 책을 받고 면지 가득 코멘트를 찬찬히 보았다. 거기에는 잘하고 있지만, 문장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으니 힘을 빼면 좋겠다는 조언이 담겨 있었다. 사실 이 말은 몇 권의 책을 실제로 번역해 보는 실전반 과정 내내 선생님에게 들은 말이기도 했다.

문장에 힘이 들어가 있다니, 힘을 빼고 번역하라니. 그런 번역은 어떻게 하는 건가요? 애초에 힘이 들어간 번역이란, 문장이란 무엇인가요? 반에서 가장 좋은 상을 받았지만 가장 머릿속이 혼란했다. 그리고 그 상을 받으면서 나는 기분이 좋았다기보다는 불길한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번역가 데뷔가 쉽지 않겠구나, 하는 예감이었다. 그리고 그런 슬픈 예감은 늘 틀린 적이 없다. 그 옛날 이오공감이 부른 그 노래처럼.




힘 빼고 하는 번역이라. 번역가 데뷔를 했고, 이제 책을 만들고 번역하는 삶을 살면서도 여전히 알듯 말듯하다. 말로 표현하기는 더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잘해야겠다는 마음에 잔뜩 힘을 주어 번역하면 독자도 힘을 바짝 주고 읽게 된다는 것이다. 이건 출판 편집을 하면서 번역가의 원고와 국내 저자의 글을 접하면서 어렴풋이 느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그걸 다 담으려고 한 글은 그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그 애씀이 보이지만, 무언가 어수선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번역서 같은 경우는 딱딱하다고 느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지은이가 편하게 쓴 글은(정작 지은이는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니까 힘이 들어가지 않은 글은 읽기도 이해하기도 편했다. 술술 읽혔다.

나는 이상하게 늘 잘하려고 애쓰면 딱딱해졌다. 몸도 마음도, 말도 언어도. 그 마음이 클수록 더 그랬다. 글이라는 게 어쨌든 그 사람의 마음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법인데 번역글도 내가 쓰는 글도 더 잘해야겠다 욕심을 내면 낼수록 오히려 더 그랬다.


힘을 빼고 번역하라는 말은 지금 생각하면 번역을 즐기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선생님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을지 모른다. 번역을 즐기고 있나요? 즐기면서 번역하세요. 그래야 오래갈 수 있어요.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나는 번역을 좋아한다. 하지만 당시 번역을 즐기고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분명 그렇지 않았다. 번역가 데뷔는커녕 이제 막 시작한 상태였으니 번역을 즐길 마음의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어떻게든지 데뷔하는 데 급급했고, 정확하게 번역하는 일에만 매달렸다. 물론 번역은 정확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작가의 뉘앙스를 살피고 그것이 잘 전달되도록 번역하는 일은 단어를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과는 좀 다른 이야기다. 거기에는 좋아하는 마음과 즐기는 마음과 이 작가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잘 버무려져서 비로소 나도 편하게 번역하고 독자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이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출간한 10권 남짓한 번역서들만 보아도 확실히 내가 즐기면서 작업한 책은 하면서도 즐거웠다. 글에 빠져 웃음이 나기도 했고 번역하면서도 좋다는 말이 줄줄 나왔다(하지만 이런 상태도 조심해야 한다. 객관성을 잃으니). 


힘을 빼고 번역하는 건 여전히 아리송하다. 여전히 욕심도 많아 작업할 때는 끙끙댄다. 몸에 힘도 바짝 준다. 그렇지만 처음 번역을 시작했을 때보다, 첫 책이 나왔을 때보다 나는 분명 즐기고 있다고 자주 느낀다. 그리고 아직도 좋아하는 일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변함이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금은 끙끙대고 욕심내다 산으로 가려고 하면, 즐기는 마음이 지상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에게 즐기는 마음은 내 안의 애씀이 애먼 곳으로 향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두에 말한 꿈에서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애쓰면서 걱정하기보다 즐거워 보였다는 것이다. 그럼 그걸로 되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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