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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tobadesign Oct 23. 2021

어느 판화하는 디자이너의 유리잔

여덟 번째 인터뷰

예전에 우리 집에도 있었을 것 같은, 한 손에 들어오는 유리컵이었다. 컵이라고 하기보다는 유리잔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기물. 왠지 둥근 얼음을 넣고 위스키를 담아 천천히 마시고 싶어지는 잔. 그런 잔이 여러 조각으로 마치 뜯긴 것처럼 깨져 있었다. 


유리 기물은 작은 조각까지도 잘 남아 있었다. 이제 다시 조각 맞추기의 시작이었다. 유리여서 혼킨츠기 기법으로는 어려워 간이킨츠기 기법으로 수리하기로 하고 연파랑 마스킹 테이프로 조각들의 원래 위치를 찾아간다. 자리가 다 잡히면 마스킹 테이프를 떼어내면서 조각과 조각 사이에 순간접착제를 흘려 고정시킨다. 하지만 가장 위쪽에 붙어야 할 작은 조각들이 문제였다. 붙은 듯하다가도 조금만 힘을 주면 자꾸 떨어졌다. 작은 조각도 살리고 싶다는 욕심에 계속 붙여 보지만 접착제 때문에 단면이 계속 두꺼워져 단차가 생기고 마음대로 붙질 않는다. 결국 유리 기물을 의뢰한 분에게 연락해 작은 조각은 과감히 버리고 단면을 합금으로 마감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작은 조각을 살리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웠지만, 가끔은 욕심을 버리고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킨츠기를 하면서 배우기도 한다.


유리잔이 지녔던 본래의 형태가 잡힌 다음 합성옻과 합금을 섞어 바깥쪽 이음새에 맞춰 선을 그려갔다. 그러다 문득 이 유리잔은 안쪽도 마감 작업을 해야 한다는 걸 바깥쪽 마감이 거의 다 진행되었을 즈음 깨달았다. 안쪽 이음새가 날것으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지난번 작업한 유리 화병은 입구가 좁아 어쩔 수 없이 바깥쪽만 한 것이었는데 공정을 미리 머릿속으로 생각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다. 결국 바깥쪽 마감을 깨끗하게 다 벗겨내고 안쪽부터 다시 선을 그려갔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실수하면 다시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이 킨츠기의 매력이다. 다시 작업한다고 하면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지만 뒤집어서 생각하면 마음에 드는 완성도가 나올 때까지 다시 작업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도 인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작업한 유리잔은 다시 작업하는 것의 매력을 배운 기물이기도 했다. 돌아가면 분명 그만큼 시간은 더 걸린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더 꼼꼼하게 챙길 수 있다. 장점과 단점은 결국 동전의 양면이라는 생각도 든다.





        먼저 자신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출판계에서 일하면서 브런치에 디자인•제작 관련 글을 연재하는 ‘판화하는 디자이너’입니다. 산골에서 자라 동식물이 있는 환경에 익숙해서인지 자연스럽게 환경보호와 쓰레기 문제에 관심이 생기게 되었어요. 그래서 최근에는 평소 버려지는 것들에 대한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버려진 천을 모아 실크 스크린을 해 아트웍으로 만들거나 플라스틱 컵을 모아 식물을 키우는 소소한 일들입니다.


        하나의 물건을 구매하면 오랫동안 사용하시는 편이신가요?

대부분 부모님께 물려받곤 했으니 오래 사용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제가 물건을 정말 잘 망가트리는 기적의 손을 가지고 있어서 새로 산 물건이 망가지는 게 무서워 주로 당근마켓의 중고거래를 애용합니다. 이케아 같은 바이백이 있는 브랜드도 좋아해요. 이케아에서 구입한 제품을 돌려주면 제품을 검수한 뒤 할인 가격으로 재판매합니다. 그래서 제 물건이 다른 사람이 찾을만한 물건인지 생각하고 사는 편입니다. 만약 제가 안 쓰게 되면 바이백, 리사이클 플랫폼에 재판매해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수리를 맡기신 그릇은 언제 어떻게 구매하셨고 얼마나 사용하셨나요?

어머니의 신혼 그릇 중 하나입니다. 어림잡아 30년 이상 된 것 같아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던 그릇이라 저보다도 나이가 많은 물건이네요. 어렸을 때 찬장에 여섯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던 모습이 기억나요. 부엌에 계시는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두 개를 깨뜨렸는데 최근에 독립하면서 나머지 컵 네 개를 선물로 물려받았어요. 그런데 마지막 하나까지 깔끔하게 깨뜨려버렸네요.


        기물은 주로 언제 어떻게 사용하셨나요? 함께했던 기억나는 추억이 있나요?

주로 어렸을 때 사용했는데 가족이 함께하던 자리에서 자주 보곤 했어요. 하지만 커가면서 기적의 손을 가진 제가 그릇 줄이는 일에 일조하다 보니 컵은 귀한 일이 있을 때 꺼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최근까지는 손님용이었지요. 그 뒤로 독립하면서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었어요.


        기물이 어떤 이유로 손상되었나요? 그리고 그때 마음은 어떠셨나요?

친구가 집에 놀러 왔는데 마실 게 부족해서 제가 편의점에 가게 되었어요. 음료를 사고 있는데 집에 있던 친구가 사색이 된 목소리로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저는 그 목소리만으로도 뭔가를 고장냈거나 깨트렸을 거라고 직감했는데 역시나 그 유리컵을 깼더라고요. 저를 가사노동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던 친구의 마음이 고마운 한편 마지막 그릇은 내 손으로 보내지 않아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람들 대부분 그릇이 깨지거나 금이 가면 버리는 일이 많잖아요. 그런데 버리지 못하시고 간직하셨던 이유가 있을까요?

저와의 시간만 존재하는 물건이라면 버리는 데 고민을 길게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족이나 지인의 시간이 함께 담긴 물건은 더는 저 혼자서만 소유한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주변 사람들 역시 이 물건을 보면 함께한 시간을 회상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를 통해 그들과 저 사이에 어떠한 유대감이 형성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함께한 시간이 물건에 묻어 있다고 생각하니 깨졌어도 더 소중히 간직하게 된 것 같아요.

 

        그릇을 수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떤 마음이 드셨나요?

본가에서 5분 거리에 큰 도자 공방이 있어요. 어렸을 때 매일 하굣길에 그 앞을 지나면 도자를 깨트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머릿속 한 구석에 그릇이라는 존재는 조금이라도 만든 이의 마음에 안 들거나 문제가 있으면 못 쓰는 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환경에서는 그릇을 수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굉장히 어렵겠지요. 그래서 킨츠기를 처음 접했을 때 경이롭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제가 상상할 수 없는 영역 그 너머에 있는 것이 우주의 끝이나 블랙홀의 안인 줄로만 알았지 킨츠기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릇을 기다리는 동안의 마음이 궁금해요.

그릇을 위한 최고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최근 플랜트 인테리어 분야에서 목부각에 식물을 키우는 게 유행이라고 해요. 그래서 킨츠기로 수선된 컵에 목부각과 식물을 담으려고 합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어요. 그리고 부모님께 혼나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기도 하고요.


        앞으로 그릇과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으세요?

저와 주변의 모든 시간을 간직해 줄 수 있는 그릇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수리해준 분에게도 기억에 남은 킨츠기 기물이 되면 좋겠네요.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가족이나 지인의 시간이 함께 담긴 물건은 더 이상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나 혼자 사용하는 물건처럼 보이지만 그 사물에는 어떤 날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했던 기억과 시간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그런 시간이 차곡차곡 쌓인 사물은 손상되었을 때 마음이 더 아프고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자신이 살아온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간직한 사물이라면 더욱 더. 


내 물건이지만 내 물건이지만은 않은 모두의 기억이 담긴 물건. 작은 조각은 살리지 못했고 수선했어도 본래 지녔던 쓰임으로는 쓰일 수 없게 되었지만, 다시 돌아간 유리잔은 지금 의뢰한 분의 일상에 어떤 풍경이 되어 어떤 사람들의 시간을 담고 있을까. 그 컵이 이어온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의뢰한 분과 함께 차곡차곡 쌓아갔으면 좋겠다.




기물을 맡기고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

판화하는 디자이너 옥이랑

인스타그램 @with_ok_

브런치 https://brunch.co.kr/@leerangok


*모든 인터뷰는 킨츠기 수리를 완료하고 기물을 전달한 뒤 서면으로 진행해 기획에 맞게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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