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는 묘한 책이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달과 동전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은유. 이상과 현실이라는 진의(眞意)가 커튼으로 살짝 가려진 탓에 여러 상상을 일으킨다. 내 손은 커튼을 열고자 애쓰지만 실패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애당초 열지 못하도록 설계된 것이므로. 서로 다른 시간을 가지기에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다. 이건 부당하다. 내 마음은 활화산처럼 분노를 내뱉고. 만남을 갈망한다. 이상과 현실이라는. 결코, 서로 마주 볼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을.
도달할 수 없음이 자명함에도 그것을 갈망하는 일은 몹시 슬프다. 나는 달리기를 하고 있다. 바로 앞에는 누군가가 나와 같은 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나는 분명 뛰고 있으나 그와의 거리는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다. 무언가 하고 있으나 무언가 계속 멀어져 간다. 내 몸은 분명 어느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고 있으나, 내 기준 또한 함께 이동하고 있다. 이를테면 통장의 월급이 쌓이는 것과 동시에 빠져나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통장 잔고은 언제나 0이다. 끝없이 달리면서도 끝없이 만족하지 못하는 나. 나는 무언가를 소모하는 동시에 탕진하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대체 이런 달리기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지독한 허무가 나를 회의(懷疑)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회의감으로 똘똘 뭉쳐진 안개는 오감을 차단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생각뿐.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이므로. 나 또한 한없는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으려 노력한다. 안갯속에서 손을 뻗는다. 휘젓고 다시 휘저으며. 안개는 흐트러지다가 다시 모인다. 무의미에서 의미로 향하는 길이 이토록 험난했던가. 잠시 쉬었다가 휘젓고 다시 휘젓는다. 미약하게 흐트러진 안갯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내 몸은 초속 1㎝로 나아가는 중이다. 방향은 알 수 없다. 그저 나아갈 뿐. 시간은 계속 흐른다. 생각도 지쳤는지 작동을 멈춘다. 지금은 ‘몸’ 홀로 나아가고 있다. 휘젓고. 1㎝ 나아가고. 내 몸은 기계다. 각인된 설명서에 따라 어찌 됐든 계속 나아간다.
멈추고 싶다. 내 몸마저 작동을 포기하려는 순간. 멈춤과 나아감의 미묘한 갈림길에서 어떤 이질적인 생각이 피어올랐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나아가는 걸까. 이상일까 아니면 걷는 행위 그 자체일까. 이상에 도달할 수 없다면, 행위 자체에 의미를 담을 수는 없을까.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면 현재, 바로 지금을 생각할 순 없을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하늘, 우주를 생각하기보다는 내 발밑의 흙을 생각할 순 없을까.
멈춤은 ‘마침’ 그러니까 ‘끝’을 의미한다. 가능성의 종말. 변화의 무덤이다. 그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지금 죽음을 바라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갈망에의 도달. 이성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외치고 있으므로 조금 수정한다.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은 갈망에의 수렴. 끝없이 0을 향해 달려가나 결코 0에 닿을 수 없는 점근선처럼. 갈망에 한없이 가까워지길 간절히 바란다.
그러려면 ‘변화’가 있어야 한다. 변화에서 가능성이 피어오르고. ‘끝’을 무한히 유예시킨다. 생각해 보라. 주가가 아무리 하한가에 도달하더라도. 내가 팔지 않으면 손해는 확정되지 않는다. ‘끝’을 유예시키는 일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마침’은 도래하지 않는다. ‘마침’의 빈자리는 실로 크다. 나는 대체할만한 것을 찾고. ‘마침내’를 ‘마침’이 부재한 공간에 끼워 넣는다. 이제 ‘마침’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공식이 완성됐다. ‘마침내’에서 파생되는 무한한 가능성. 그 심원한 전복(顚覆)의 가능성이 변화를 끌어들이고. 변화는 우아하게 갈망으로 다가간다.
나는 여전히 안갯속에서 헤매는 중이다. 속도도 모르고 방향도 모른다. ‘인생에서 속도보다 중요한 건 방향’이라고 설파했던 분이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기겁할 게 분명하다. 저놈은 대체 뭔가 하고. 그러면 나는 차분히 답할 테다. 어쨌든 나아가는 중이라고. 알 수 없는 결말보다는 지금의 과정을 직시하고 있다고. 끊임없이 발을 움직여 마침내 ‘마침내’를 만날 거라고 말이다.